첫 사회생활 적응기 1
대학교 4학년. 그동안 부모님께 학비며 생활비를 받아 지낸 것에 대한 보답으로 졸업 전에 취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독립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오랫동안 일을 하고 싶었다. 경제적으로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나 스스로도 딱히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생활적인 면에서 자유로워야 그다음의 미래가 보일 것 같았다. 취업을 하려고 보니 그나마 전공분야로는 기회가 보였다. 대학 입학 후 첫 강의 때 지도 교수님이 전공지식, 영어, 컴퓨터 실력을 4년 동안 키운다면 취업은 보장될 거라는 말이 4학년이 되고 보니 절실히 와 닿았다. 남은 1년간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는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국내 대기업, 중소기업의 공고가 나는 대로 지원은 했지만 외국회사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바람이 있었다. 국내 기업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일하고 결혼, 출산, 육아를 하더라도 경력을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외국회사는 공석이 생겼을 때 경력자를 채우는 방식이라 신입을 채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도 언제고 올지 모를 기회를 염두에 두고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 영어공부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을학기가 시작되기 전 우연히 과 사무실에 들렀다가 미국 의료기기 회사에서 대졸 신입 채용공고를 알게 되었다. 조교로 있는 선배가 흔치 않은 기회라며 일단 이력서를 내보라고 했다.
아직은 한낮의 기온이 여전히 뜨거운 9월 오후, 지원한 의료기기 회사에 면접이 있었다. 인터뷰를 진행하신 분은 경상도 사투리가 구수한 남자분이셨다. 전공 관련 질문들을 한동안 이어갔고 자기소개와 전공 관련 영어 인터뷰도 했다. 전공 관련 예상치 못한 질문에는 솔직히 기억이 안 난다고 얘기했다. 한국지사를 설립하고 막 비즈니스를 시작한 회사라 부서마다 인원을 채용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졸업 전에 일할 수 있냐는 질문과 남은 대학생활 잘 마무리하라는 격려의 말씀도 주셨다. 면접을 하고 나오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고 등이 땀으로 축축했다. 긴장을 하긴 했지만 좋은 경험 했다 생각하고 더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다 다짐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역 근처 모 대기업에 비서 자리도 면접을 치렀다. 임원 비서였는데 전공에 대한 것보다는 일반적인 비서 역량에 대한 질문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취업문이 좁아 어디라도 기회가 오면 일단 지원했는데 다행히 면접을 보는 과정에서 비서라는 자리가 나와는 맞지 않겠다는 것, 국내 기업보다는 외국기업으로 방향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수업, 도서관, 과 사무실을 오가며 어딘가 내가 필요로 하는 곳은 있을지라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은 늘 마음속에 있었다. 책을 들여다보면서도 나에게 맞는 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오길 간절히 바랐다. 면접 후 일주일쯤 후 의료기기 회사에서 사장님 면접 일정을 알려왔다. 시사적인 부분과 대학생활에 대한 질문을 주셨고 면접 중에 예기치 않게 본사에서 전화 통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긴장한 상태로 잠시 다른 분의 안내를 받기는 했지만 회사의 대표라는 자리에 대한 무게감을 조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의료기 회사뿐만 아니라 비서 자리에도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선택의 여지없이 비서 자리에는 감사하지만 다른 곳에 취업이 되었다 하고 기쁜 마음으로 학교에 가서 회사일과 학교 공부 병행에 대해 조교 선배의 조언을 구했다.
그렇게 졸업하기 전 9월 중순부터 나의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학교 공부와 회사일을 병행하는 건 쉽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지사를 셋업 하는 회사라 부족하나마 신입을 채용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나 싶다. 하나를 배우면 그 이상의 것을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다른 분들 눈에는 좋게 비쳤던 것 같다. 실수를 하더라도 더 나아갈 수 있게 기다려준 동료분들 덕분에 사회생활을 순조롭게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운이 좋은 뿌리가 되어 물을 찾았다. 첫 뿌리의 닻을 내리는 나의 임무가 시작되었다.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랩 걸 Lab Girl > p52
첫 뿌리가 감수하는 위험만큼 더 두려운 것은 없다. 운이 좋은 뿌리는 결국 물을 찾겠지만 첫 뿌리의 첫 임무는 닻을 내리는 것이다. <랩 걸 Lab Girl> p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