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는 수많은 나가 있다

직업정체성

by 꽁스땅스

오늘은 카페 봉사 가는 날이다. 커피를 배우고 교육장에서 카페도 운영한다기에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전에 봉사 신청을 했다. 3개월간의 교육이 끝나고 목요일 오후 시간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필기시험이야 공부를 하면 되지만 실기시험은 기계와 친해져야 했다. 좋은 마음에서 봉사하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실기시험에 대한 대비도 하나의 이유였다.


2018년 12월부터 봉사를 시작했으니 올해 12월이면 2년이 되어간다. 교육장이 있는 카페이다 보니 커피를 배우러 오는 다양한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무사히 바리스타 자격증도 취득했다. 돌이켜보면 회사라는 울타리와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의 직업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감사하게도 함께 해온 봉사자들이나 강사님들, 신부님까지도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라는 조직과는 달랐던 것 같다. 판매 수익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 보내진다. 요즘 카페에서의 커피 가격에 비하면 좋은 원두에 낮은 가격으로 판매를 한다. 이익을 남기려 하기보다 나눔의 의미가 더 큰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특별한 마케팅이랄 것이 없이 교육생들을 통해 알음알음 알려져 배우러 오기도 하고 원두 맛을 못 잊어 찾아온다. 오후 봉사자였다가 카페장님이 목요일 오전부터 봉사를 부탁하셨다. 2019년 6월부터는 목요일 전일 봉사를 하게 되었다.


올해 여름 교육팀장님이 봉사를 할 만큼 했으니 강사를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셨다. 새로 오픈한 상도점에 월요일마다 강사 지망생들이 봉사도 하고 함께 커피 공부를 한단다. 인원을 모집 중이니 인제는 새로운 것도 해보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봉사자분은 좋은 기회이니 당장 시작하라고 했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그리고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그것 또한 기회라고 하셨다.


3개월간의 강의를 다시 청강하고 내가 관심 있는 분야를 선택해서 자료를 만들고 신부님과 강사님들 앞에서 시연강의를 해야 한다. 그런 과정이 통과가 되면 정식으로 강의를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인지.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닌지? 나에게 모험 같은 활기를 주는 일인지. 계속해서 커피에 대한 공부를 하고 내가 아는 지식과 기술을 전달하는 것.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며칠 뒤 교육팀장님께 월요일에 상도점에 나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8월부터 상도점에 월요일도 나가게 되었다. 오전에는 원두 주문, 드립 백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 봉사자들과 블렌딩, 택배 작업을 주로 했다. 오후에는 교육팀장님이 커피 관련 하나씩 실습을 해 보기도 했다. 코로나로 상도점은 운영을 안 하기도 했었다. 숙대점이야 2년이 다 되어가니 어디에 뭐가 있는지 환한데 상도점은 새로웠다. 새로운 봉사자들과 서먹함, 또 다른 커피 머신,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필요했다.


강사를 마음에 두고는 있지만 상도점 봉사에 나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따로 청강을 들어야 하는데 월요일, 목요일 봉사를 제외하고 또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일단 둘째의 학원 일정에 동행해야 하는 변수도 있었다. 이래저래 청강을 미뤄야 하는 이유를나는 찾고 있었다. 오늘이 그 상도점 봉사를 가는 날이었다.


오늘 교육팀장님과 다른 봉사자 한 분은 일이 있으셔서 못 나오시고 나까지 네 명이 함께 했다. 원두 주문 처리를 하느라 택배 작업하느라 오전 내내 시간을 보냈다. 평소보다 차분한 분위기였다. 점심을 먹고 차 한 잔을 하는데 출근길에 창가에 놓인 화분의 먼지가 또 눈에 들어왔다. 막내 봉사자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화분 먼지랑 놓인 바닥을 청소하자고 했다. 걸레를 들고 화분을 하나씩 들어내니 열심히 닦는다. 다시 화분을 제자리에 놓는데 화분의 위치를 바꾸는 표정이 신나 보였다. 어느새 한 봉사자분이 주전자에 물을 채워 화분에 물을 주신다. 카페가 훤해졌다.


봉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분은 코로나로 자격증 시험이 미뤄져 교육만 마친 상태였고 한 분은 강사 준비를 위해 청강을 시작한 분이었다. 두 분은 서로의 현재 입장에서 이곳에서 봉사를 하는 것도 감사하다고 했다. 월요일 아침이 되면 봉사 올 생각에 설레기도 하지만 봉사자가 여럿이니 나 하나쯤이야 안 가도 그만이지 않나 싶기도 한단다. 오늘 아침에도 그런 마음으로 출근을 했는데 막상 와보니 인원이 없어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내 마음을 들킨 거 같아 뜨끔했다. 강사가 되기 위한 앞으로의 여정이 막연해 보여서 본인들도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좋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지금은 그냥 봉사하는 일에 감사한다고 했다. 교육팀장님은 선한 사람들만 잘도 갖다 모아놨다는 생각을 혼자 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과 비슷해서 조금 놀라기도 했다. 서로의 솔직한 마음을 알게 되어 위로가 되기도 했다.



책 <폴리 매스>에서 21세기 직업 풍경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포트폴리오 노동자'라는 개념이 소개된다. 직업세계에서 자신의 다양한 재능을 발휘하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차례로 직종을 옮기는 방법이 있고 다수의 직종을 동시에 추구하는 방법이 있다.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은 '포트폴리오 노동자'로 불리기도 한다는 거다. 어느 한 시점에 다수의 프로젝트 혹은 여러 직무를 맡는 방식이다. 서로 무관한 영역에서 다수의 직업을 갖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1세기에는 다양한 형태로 잠재적 소득원이 증가할 전망이라고도 했다. 어떤 이에게는 긱 경제 gig economy(단기 계약직이나 임시직 형태로 원하는 만큼 노동력을 공급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형태)가 경제적 불안정을 의미하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기회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거다. 경영학자 찰스 핸디는 경제가 어려울 때는 포트폴리오 노동자가 되면 실업 위험이 줄로 현명한 생존전략이라고 했다. 포트폴리오 노동자로 살아가는 방식이 일과 생활 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더 만족을 주었다는 연구도 있다고 했다. 다양한 인생을 살고 하고 싶은 내면의 욕구를 충족하는 길이라고도 한다.


책에서 소개한 포트폴리오 노동자라는 개념은 요즘 얘기되는 N 잡러의 또 다른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 봉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 자신의 선택을 제한하는 결정을 내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가능성을 하나하나 실현해 보는 것 또한 나를 확장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니 말이다.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은 접어두고 나에게 온 기회를 내 힘으로 헤쳐나가기 위한 용기를 내는 것만이 지금 나에게 필요한 일이다. 우리 안에는 수많은 나가 있다!

직업 정체성이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숨어서 언젠가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보물 한 개가 아니다. 그보다는 수많은 가능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안에는 수많은 나가 있다. <폴리 매스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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