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꽁스땅스 Jan 26. 2021

왜 어머님 묵은 맛있을까?

묵요리의 정석

동네 아파트 상가에 수제 두부집이 있다. 우연히 지나가다 발견했는데 허름하지만 아주머니 손맛이 좋아 자주 찾게 되었다. 손두부, 순두부, 도토리묵을 직접 만드시고 청국장, 냉동만두와 감자옹심이도 파신다. 모든 음식이 그렇지만 손두부는 다시 데우는 것보다 바로 만들었을 때가 따근 하니 맛있다. 그래서인지 늘 품절이다. 내가 주로 사는 아이템은 순두부랑 도토리묵이다. 아주머니께서는 포장할 때 손수 만든 양념간장도 챙겨주신다. 하얀 순두부 그대로 먹는 걸 좋아하지만 남편이나 아이들은 양념간장을 찾는다. 친정 엄마가 만들어 준 것 같아서, 또 따로 만드는 노고를 덜 수 있다.


코로나 이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 늘어나면서 엄마로서 매 끼니마다 정성 가득 담은 음식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배달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가끔 치킨 찬스나 동네 맛 좋고 세련된 중식당에서 배달을 시켜먹기도 한다. 수제 두부집 또한 또 다른 찬스가 되었다. 남편 쉬는 날 고수부지나 아차산을 지나 워커힐 산책로를 함께 걷는다. 보통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장을 보기도 한다. 며칠 전 그날도 산책 후 마트로 가던 길이었는데 남편이 기특한 제안을 했다.


" 오늘 저녁은 왜 그 수제 두부집 있잖아. 3단지 아파트 상가 지하에. 거기서 오랜만에 순두부랑 도토리묵 사가서 먹자"


"오호, 나 그렇지 않아도 마트에서 찬거리 뭐 살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좋은 생각!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직접 만들어서 그런지 더 고소하고 담백하더라고. 도토리묵은 양념간장에 찍어 먹든지 냉장고에 있는 야채 숭숭 썰어서 샐러드처럼 같이 무쳐도 애들이 잘 먹더라"


"두부, 도토리묵 둘 달 몸에 좋은 음식이니 자주 애용하자고. 내가 쉬는 날 사러 와도 되고"


" 그럼 나야 너무 좋지. 한 끼 뭐해줄까 고민 안 해도 되고"


그날 순두부와 도토리묵으로 온 가족이 담백한 저녁식사를 끝냈다. 오후 간식을 먹어서인지 순두부 양이 많았었던지 도토리 묵이 남았다.


" 어째서 도토리묵이 남았지? 또 데워먹으면 맛없을 텐데"


" 남은 건 나중에 김이랑 깨소금 양념해서 먹으면 되겠네"


" 아하 어릴 때부터 나 그거 엄청 좋아했어. 애들도 명절 때 어머니가 만든 청묵에 김가루 양념해주면 잘 먹었지. 오케이!"



로마(시댁)에 가면 로마법(시댁 법)을 따라야 하니

결혼 후 처음 시댁에서 설 명절을 지냈을 때가 생각난다. 이미 그전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고 시부모님이 편하게 해 주셨다. 며느리와 함께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시어머님은 미리 고기, 생선, 과일, 야채 등을 준비해 놓으셨다. 일하는 며느리에 대한 배려가 느껴졌다. 친정에서는 막내지만 부엌에서 엄마의 잔심부름을 하며 본 게 있어서인지 대충 어떤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지 감은 있었다. 그래도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니 모르는 척하고 어머님께 여쭈며 곁에서 도왔다. 고기산적, 생선구이, 그밖에 각종 전을 준비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시간이 되었다. 식구들 저녁상을 차리고 함께 식사를 한 뒤 설거지까지 마무리하고 인제 좀 쉬려나 했다. 그런데 어머님이 또 뭔가를 준비하셨다.



묵요리의 정석

메밀쌀과 삼베 주머니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둥근 그릇과 사각형 모양의 묵틀을 꺼내셨다.


"주전자에 물을 좀 꿇여야겠다" 말씀하신 대로 적당히 물을 부어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 묵 만드시려나 봐요"


" 그래 내일 명절날 아침에는 분주하니까 늘 다른 거 다 만들고 전날 저녁에 만들어"


바닥에 신문지를 넉넉히 깔고 그 위에 스테인리스 볼을 준비하셨다. 삼베에 메밀쌀을 부으시고는 이어서 따끈해진 물을 조금 부으셨다. 메밀쌀이 든 삼베 주머니를 조물조물 씻으시고는 첫 물은 따라 버리신다. 그리고는 메밀쌀을 베주머니에 넣고 물을 조금씩 부으라는 신호를 주시면서 손으로 주물럭거리셨다. 메밀쌀의 전분 같은 우윳빛의 고운 거품이 생기면서 스테인리스 볼에 채워져 갔다. 따끈한 물을 거의 다 쓰고 볼에 주물럭 거려 생긴 걸쭉한 우유 거품을 냄비에 부으셨다. 풀을 쑤듯이 계속 저어주셨다.


"어렸을 적에 먹어봤지?"


"네! 친정 엄마가 쑤는 걸 본 적 있어요"


" 나도 애들 어렸을 적에 따로 간식이 없어서 자주 이걸 만들어 주었지." 점점 묽었던 게 되직해졌다. 소금으로 간을 하시고 참기름을 조금 넣으셨다.


"사각 틀을 식탁에 준비해 줄래"


"네" 되직해진 냄비에 있던 내용물을 사각 틀에 곱게 부으셨다. 냄비에 남은 걸 숟가락으로 긁어서 예쁜 종지에 모아주신다.


"맛 좀 볼래? 요걸 애들이 더 좋아했지"


" 맞아요! 저도 친정 엄마가 청묵 다 쑤시면 냄비째로 들고 긁어먹은 기억이 있어요"


어머님이 건네준 종지를 받아 들고 한입 듬뿍 떠서 입속으로 쏙! 참기름의 고소함과 메밀의 구수함에 속이 든든하다. 좀 전에 저녁을 먹었는데도 계속 손이 갔다.


묵 한 접시 하실까요?

아이들이 태어나고 이유식을 시작할 무렵 맞은 명절이면 언제나 청묵은 좋은 간식이 되었다. 묵틀에 붓고 나서 남은 걸 긁어 숟가락으로 입에 넣어주면 쏙쏙 잘도 받아먹었다. 아이들도 그 맛을 아는 걸까? 명절 전날 묵틀에 부은 청묵은 다음날이면 굳어서 탱탱해진다. 명절날 아침 차례상에 올리기 위해 어머님이 잘라서 통에 넣어두신다. 잘라서 먹으면 도토리묵만큼 찰지고 구수하다.


아이들이 자란 후에는 그냥 먹어도 맛나지만 깍둑썰기를 하고 참기름에 간장을 조금 넣고 깨소금과 김가루를 부숴 넣으면 또 다른 별미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의 상차림에 김가루 소복이 얹은 묵 한 접시를 올려놓으면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좋아한다. 지금도 명절이면 어머님은 우리 가족이 즐겨하는 간식인 청묵을 쑤신다. 찾아보니 제주도에서는 메밀묵을 청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트산 메밀묵이랑 어머님표 청묵의 맛 차이 때문인지 나는 다른 음식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어머님의 정성스러운 손놀림으로 탄생한 청묵! 여러 해 지켜봤지만 어머님처럼 만들 수 있을까 싶다.




도토리묵을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고 설거지를 하며 어머님의 청묵 생각이 났다. 그날 남은 도토리묵은 다음날 저녁 채반에 담은 채 뜨거운 물을 끓여 천천히 부어주었다. 다시 탱글 해진 도토리묵에 참기름, 간장, 깨소금과 김가루를 풍성하게 뿌려 식탁에 내놓았다. 다행히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접시가 싹 비워졌다. 이번 설에는 코로나로 어머님의 청묵 필살기를 전수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능하다면 좀 더 눈여겨보고 내가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넌지시 말씀드려 보아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육아도우미 이렇게도 찾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