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했던 그때

<오늘 서강대교가 무너지면 좋겠다>를 읽고

by 꽁스땅스

알람 소리에 일어나 남편 아침을 준비한다. 남편이 식사하는 동안 촛불을 켜고 잠시 명상과 기도를 한다. 남편 출근 후 아이들 방을 잠시 들여다보곤 수영가방을 들고 수영장을 향한다. 멤버들과 반가운 아침인사를 하고 풀 안에 들어가 워밍업을 하고 코치의 리드에 따라 호흡과 동작에 집중하며 수영을 한다. 집으로 와서 아이들 방을 한 번 더 보곤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커피를 내려 거실 책상에 앉는다. '오늘 무슨 책을 읽을까?' 거실 밖으로 보이는 건너편 아파트 단지의 나무들이 오늘따라 초록 초록한 게 기분을 좋게 한다.


내 생에 이런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줄이야! 최근 일 년 반 몸과 마음이 홀가분한 적이 있을까? 25년간 회사원으로 살았던 내가 이제야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찾기 위해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고 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건 불안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을지. 설령 찾더라도 나를 받아줄 곳은 있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책을 읽고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기회가 되어 아바 매 글, 한 달에서 매일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게 되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회사원으로 사는 내내 긴장과 불안에 시달렸다. 적시에 정확한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 회계팀의 특성상 늘 예민해져 있었다. 사실상 결산자료가 현재의 회사 성과 나 재무 상태를 알려주는 기초가 되므로 향후 예측을 하는데 중요하다. 부서 내부적으로 월 마감 후 지표들을 산출해 내고, 외국 본사에 공식적인 분기, 반기, 연결산 보고서를 제출하고, 분기마다 이미 계획된 예산 대비 마감된 달을 반영해서 남은 한 해를 예측 자료를 만든다. 부수적으로 향후 2년에 대한 예측, 그리고 내년을 위해 예산작업을 한다. 적은 인원으로 일당백을 해내야 하는 게 외국회사의 생리인지라 정시 퇴근하는 날은 손에 꼽았고 주말에 출근하기도 했다.


마감이 끝나면 그때부터 보고서 작성을 하고 메모를 쓰기 시작한다. 쉽게 말해 손익의 변동에 대해 예산 대비, 전년대비 원인 분석에 대한 설명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타 부서와의 협조가 긴밀하게 이루어져야 놓치는 것 없이 반영되고 팀원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줘야 마감 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분석하는 시간을 벌지만 단 한 번도 여유롭게 메모를 쓴 적이 없다. 본사에 보고서 제출기한 하루 전에 마감을 하고 부서 디렉터와 예산팀과 함께 회의를 거치고 나서야 메모를 작성할 수 있다. 책상 위 달력이 표시한 보고서 제출 기한들에 맞춰 시간에 쫓기며 지냈다. 그래도 메모까지 마치고 본사에 제출하고 퇴근할 때면 최선을 다해 마무리한 우리 팀원들, 동료들이 고맙게 느껴졌다. 혼자라면 절대 못할 일을 함께해서 해낸 우리 팀이 너무 대견스럽고 끝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이 짜릿했다.


의료기기 회사에서 3년 넘게 일하며 사회 초년생의 때를 벗기고 함께 일하던 이사님의 제안으로 반도체 회사에서 5년 넘게 일했다. 주변 환경에 해외지사로 파견근무를 신청하는 분도 계시고 자기 계발을 꾸준히 하는 분들도 계셔서인지 나 역시 전공 관련 자격증 공부를 하는 자극이 되었다. 회사를 잠시 쉬면서 자격증 공부를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취업한 패션회사에서 15년 넘게 일할 수 있었다. 업종은 달랐지만 회계라는 전공 덕분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은 외국회사에서 별 탈 없이 순탄하게 사회생활을 했다.

회사 생활을 하며 사람과의 관계에서 힘들었던 적은 누구나 겪는 어려움일 텐데 웬만하면 상대에서 양보하는 편이다. 어찌 보면 개성이 없는 듯 나약해 보일 수 있겠지만 팀으로 움직이는 조직생활에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가는데 내가 좀 손해 보거나 불편하더라도 감수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팀 내 개성이 뚜렷한 디렉터가 오면서 배려하고 퍼주기만 하다 팀원들, 타 부서 동료들 사이에서 심적으로 압박감이 들기 시작했다. 자꾸만 길어지는 근무시간과 10년 가까이 함께한 팀원들의 이직으로 인해 그 자리까지 메꾸느라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만 갔다.


10년 넘게 일당백의 역할을 하던 팀원 자리에 2-3년 차 경력자라니. 시스템도 바뀌어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데. 아무리 설명해도 본인의 뜻을 굽히지 않는 디렉터에게 서운했고 내가 고작 요런 거 하나 설득을 못 시키고 이 고생을 하나 싶었다. 양보하고 참기만 하는 내가 정말 바보 같았다. 밤잠을 설치고 회사 근처에만 가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상이 심해갔다. 몸도 마음도 이제 좀 쉬라고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자정까지 야근을 하다 문득 " 이렇게 하다 진짜 크게 아프겠구나. 건강을 잃으면 누가 보상해 주며 아이들은 누가 돌보지. 이렇게 사는 건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6월 결산을 마지막으로 담담하게 사직서를 냈다.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들이 새록새록하다. 힘든 기억보다는 일을 통해서 행복했던 기억들이 훨씬 더 많이 숨어있어 놀랍다. 몰래 조용히 눈물을 흘린 적도 있지만 주어진 현실에서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앞으로 어떤 여정이 펼쳐질지 몰라 불안하긴 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에, 그리고 카페 하랑 바리스타로 봉사하는 일에 애정을 품고 최선을 다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내 마음에 쏙 드는 나의 일을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일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깊어질 테니. 마침내 내 마음에 쏙 드는 나의 진면모를 발견할 테니.
<오늘 서강대교가 무너지면 좋겠다>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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