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는 수수께끼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일어나서 책을 읽으라고 하면 나는 바짝 긴장했다. 심장이 쿵쿵 뛰고 너무 떨려서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읽다가 실수할까 봐 한 줄 한 줄 놓치지 않으려고 책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어느새 내 얼굴은 점점 빨개지고 그만 앉으라는 말을 들을 때면 귀까지 붉어져서 한동안 축축해진 손과 뜨거워진 얼굴이 식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책을 읽거나 발표하는 친구들을 볼 때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만 했다.
중학교 때는 음악을 좋아해서 교내 합창단 활동을 했는데 아담한 키라 항상 맨 앞줄 중앙이 내 자리였다. 지휘자 선생님에 가려 관중들 눈에 안 띄기를 바라지만 발표회 때가 되면 얼굴이 빨개진 채 노래하는 나를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피부색이 밝은 편이라 붉어진 얼굴이 더 도드라져 보였으리라. 소심한 성격 탓인지 시선이 집중되면 갑자기 부끄러워지면서 모든 사람이 나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 땀이 나기 시작하고 얼굴에는 어느새 열이 올랐다. 누군가 "얼굴 빨개졌네!"라고 말이라도 하면 내 얼굴은 더욱 시뻘게졌다.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연차가 쌓일수록 부서 자료를 공유하거나 회의에서 의견을 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기회가 많아지다 보니 예전에 비해서는 얼굴이 빨개지는 일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할 때면 신경이 곤두서서 긴장을 하고 얼굴이 빨개지고 끝나고 나면 사우나를 한 것 마냥 내 등이 땀으로 축축해짐을 느꼈다.
책 < 피부는 인생이다>에서 얼굴이 붉어지는 현상에 대한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부끄럽다고 느끼는 상황에 처하면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아드레날린은 혈관을 확장해 얼굴, 귀, 목으로 피가 쏠리게 만든다. 얼굴이 붉어지는 현상은 보통 이 정도 부위로 국한되지만 '홍조'는 피부 다른 부위에도 나타날 수 있으며(몸통, 손, 발) 보통 약이나 알코올, 다른 질환에 의해 나타난다는 차이가 있단다. 남편의 경우 술이 잘 안 받는 체질인지 한 잔만 마셔도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붉어져 홍조를 띤다. 놀랍게도 얼굴이 빨개지는 현상과 관련되어서는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얼굴이 붉어지는 현상은 다른 사람이 그 변화를 알아차려야 성립된단다.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누군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시각적으로 인지하면 그 일이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데 피부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거란다.
얼굴이 붉어지는 현상에 담긴 수수께끼
저자 몬티 라이먼은 얼굴이 붉어지는 현상에 담긴 가장 큰 수수께끼는 "애당초 왜 인체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하는 점이고 과학계, 심리학계, 사회학계 모두가 이 현상에 푹 빠질 정도라며 흥미로운 연구와 관찰 내용을 소개한다.
다윈은 얼굴이 붉어지는 변화가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며 사회적 환경에서 수치심이나 수줍음을 느낄 때 비자발적으로 나타나는 신체 반응이라고 보았다. 혼자 있을 때는 어딘가 어색하고 부끄럽고 창피하다고 느껴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이 현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여러 연구를 통해서도 간단히 "지금 얼굴이 빨개요"라고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얼굴을 붉히게 만들 수 있다고 밝혀졌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피부를 뚫고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원치 않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 어딘가 도망가고 싶어 지지만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이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목적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회적 규범이 깨졌음을 인지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며 자신의 실수를 용서해 달라는 사과로 비친다는 것이다. 체면이 잠깐 깎이는 것이 사회적 유대를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얼굴이 붉어지는 증상을 약화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
저자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너무나 큰 타격이라면 증상을 약화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첫째는 얼굴을 이완하는 것이다. 얼굴 이완에 가장 좋은 방법은 미소다. 미소는 얼굴이 붉어지는 현상을 약화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적 상황에서 분위기를 원만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둘째는 의식적으로 정신이 얼굴이 붉어진 현상 말고 다른 곳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심호흡을 하고 폐로 공기를 충분히 들이마신 후 천천히 뱉는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가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고 상상하면서 '스스로 열을 식히는'것도 방법이다.
셋째는 수분을 충분히 공급해야 한다. 그래야 얼굴이 붉어지는 빈도도 줄고 덜 붉어질 뿐만 아니라 피부과 몸 전체 건강에도 좋다.
책에서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은 얼굴색에 변화가 없는 사람보다 더욱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다고 했다. 게다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눈에 띄지 않고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금방 잊는다는 것이다. 연구를 통해 얼굴이 붉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 현상에 따르는 대가를 과도하게 부풀려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나 역시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낄 때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 내가 전달하는 내용을 잘 이해할지, 실수하지는 않을지 생각이 많아진다. 신체의 나이만 먹었지 마음의 나이는 아직 초등학교 때를 못 벗어났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책을 통해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면도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우리의 심리적인 무게를 그 어떤 기관보다도 많이 짊어지고 있는 피부는 인체의 어떤 행위로도 불가능한 우리 마음을 나타내 주는 수수께끼 같다. 세상과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렌즈인 피부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찰스 다윈은 저서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다음과 같은 관찰 내용을 전했다.
얼굴이 붉어지는 현상은 인간에게 나타나는 표현 중 가장 기이하고 가장 인간답다... 피부를 간질이며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 수 있고 주먹으로 한방 치면 흐느끼거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 수 있고 고통이 찾아온다는 두려움을 심어서 벌벌 떨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얼굴이 붉어지는 현상은 억지로 만들 수 없다.... 신체적 수단, 즉 인체의 어떤 행위로도 불가능하다. 필수 요소는 바로 마음이다. 비자발적 현상일 뿐만 아니라 붉어지지 않기를 바랄수록 스스로 그 현상에 더 몰두하게 되고 얼굴이 더욱 붉어지는 결과가 초래된다. < 피부는 인생이다> 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