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계의 나폴레옹 로시니

19세기 오페라

by 꽁스땅스

저자 올랜도 파이지스는 책 <유러피언>에서 1900년에 이르러 유럽 대륙 전역에 같은 책을 읽고, 같은 그림을 복제하고, 같은 음악을 가정이나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거나 감상하고, 같은 오페라가 유럽의 주요 극장에서 공연되는 분화적 현상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설명한다고 했다. 철도시대의 도래로 '유럽 문화'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밝혀내는 것이 이 책의 주제라고 했다.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19세기, 초반을 읽었는데 문학, 음악의 거장들의 얘기가 소개되어 지루한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다. 오늘은 로시니를 중심으로 당시 오페라 산업에 대해 내용을 요약하고자 한다.



이탈리아 오페라 유럽으로 수출

서유럽에서 오페라는 17세기 이래 계속 번창 해왔다. 오페라는 궁정의 은밀한 행사로 시작되었으나 곧 대중오락으로 변모되었다. 처음엔 베네치아에서 공연되었고 그 이후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오페라가 왕실의 통제를 받았던 프랑스와는 다르게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에는 오페라 극장이 있었고 한 집단의 귀족 혹은 부유한 상인과 전문가들이 오페라 극장을 운영했다.(1868년 이탈리아 최초 전국 국세조사는 775개의 오페라 극장이 있다고 기록함)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통하여 오페라 사업의 운영모델은 비슷했다. 오페라의 특별석 예약자들이 컨소시엄(조합)인 극장 소유주들은 예전에 가수이거나 작곡가였던 흥행주와 계약하고 이 흥행주는 다시 한 시즌 동안 공연할 악단을 조직한다. 흥행주는 극장 소유주들로부터 선급금을 받고 또 특별석의 티켓 판매로 수익을 올린다. 하지만 극장은 연간 사용료를 받고 개인 박스 석을 임대하여 수입을 올린다. 이탈리아 어디에서나 한 도시의 엘리트 관객만으로는 관객 규모가 부족하므로 악단은 더 많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꾸준히 순회공연을 나서야 한다. 이렇게 하여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군소도시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힘을 발휘했다. 오페라 언어는 방언을 사용하는 곳에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를 순회하는 악단은 오페라를 이탈리아에서 유럽 각국의 왕궁으로 수출했다. 유럽 국가들의 수도에서는 도시별로 수요에 따라 새로운 오페라 극장을 세웠다. 18세기에 오페라가 뿌리를 내린 곳에서-가령 헨델의 런던이나 글 루크의 빈- 그 스타일은 본질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온 것이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세계적 지배는 매우 완벽하여 모든 나라의 작곡가들은 이탈리아 방식의 오페라를 작곡했다.(독일인 시몬 마이어 1795-1820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을 위해 50편 이상 오페라 작곡, 십 대 소년 모차르트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을 위해 3편, 오스트리아 극장을 위해 많은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함)


이탈리아 오페라의 국제시장을 최초로 매점한 사람은 로시니였다. 유럽과 그 외의 지역에 있는 극장을 석권한 로시니는 음악계의 나폴레옹이었다. 로시니를 고용한다는 것은 곧 오페라 극장에게는 돈을 벌 수 있다는 보증 수표였다.

멜로디가 좋고 경쾌한 로시니의 오페라는 경박한 오락이 대세였던 왕정복고 시대의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 맞춤형 음악이었다.



산카를로 극장장 도메니코 바르바자

산 카를로의 극장장은 도메니코 바르바자로 예리한 사업가에서 흥행주로 변신한 사람이었다. 이 극장장은 오페라로 돈을 벌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다.


바르바자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 있는 카페에서 웨이터로 경력을 시작했다. 오페라 개인 박스석에 관람 고객들에게 음료를 제공하고 커피를 발명하여 인기를 얻었으며 그 사업으로 큰돈을 만지게 되었다. 1796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가 밀라노를 점령한 시기에 극장 내 도박 금지했던 옛 오스트리아 법령이 폐지되었다. 바르바자는 이때 라 스칼라 현관에서 룰렛 테이블(나폴레옹의 장교들이 이탈리아에 도입한 도박게임)을 운영하는 수익 높은 권리를 따냈다. 그의 도박사업은 재빨리 프랑스인들이 점령한 다른 도시로까지 확대되었다. 바르바자는 이 도박 신디케이트를 운영하는 데 놀라운 재주를 발휘했고 그런 조직력으로 재빨리 오페라 운영에 도입해 왔다. 바르바자는 나폴리에서 산카를로뿐만 아니라 그보다 규모가 작은 테아트로 데이 피오렌티니도 소유했는데 룰렛 테이블에서 나온 수익금을 최고의 오페라 가수들을 고용하는 데 투자했다. 산카를로에서 1815년부터 1822년까지 음악감독으로 근무했던 로시니는 매해 오페라를 두 편 쓰기로 계약을 맺었다.



음악계의 나폴레옹 로시니

19세기 초에 오페라 산업은 순회 직인들이 벌이는 국제적 사업이었다. 젊은 로시니는 1810년까지는 음정 코치와 하프시코드 반주로 생계를 연주했다. 당시 그는 볼로냐에 있는 테아트로 델 코르소 극장의 작곡가로 근무했다. 그의 계약서는 그의 신분이 '음악의 직인(mercante di musica)'임을 밝히고 있다.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들이 그들의 신분 상승을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가들은 왕궁과 귀족의 살롱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오페라 사업에서 흥행 주는 먼저 작곡가를 선정하여 그에게 오페라 대사에 알맞은 곳을 쓰게 하고 리허설을 감독하고 3회 공연이 끝날 때까지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그 공연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작곡가는 이런 서비스를 해주고 대가 장인에 준하는 1회 성 보수를 받는다. 계약을 성실하게 이행하면 자유로운 몸이 되어 다른 도시에서 직업을 유지할 수 있다. 오페라 제작은 아주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지므로 1년에 여러 편의 오페라를 공연할 수 있었다. <세비야의 이발사>는 로시니가 작곡에 착수한 지 한 달 만에 무대에서 공연되었다.


로시니는 맹렬한 속도로 오페라를 썼다. 작곡하기 시작한 첫 5년 동안 16편을 써냈는데 그중 상당수가 전작들을 재활용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먼 곳으로 여행하지 않던 19세기 초엽, 이러한 재활용은 오페라 작곡자들 사이에서 흔히 있은 일이었다.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는 재탕한 작품도 새로 쓴 작품인 것처럼 넘어갈 수 있었다.


이런 재활용 관습이 생겨난 것은 철도시대 이전의 오페라 제작의 경제학과 관련이 있었다. 그 당시 극장들은 비교적 좁은 지리적 지역에서 청중을 동원해야 했기 때문에 해마다 같은 청중들을 끌어들이려면 여러 편의 새로운 작품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 산업에 종사하는 작곡가는 독창적인 작품을 써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런 재활용 작업으로 유명한 도니체티는 1827년 나폴리에서 바르바자와 계약을 맺는데 3년 동안 12편의 오페라를 작곡한다는 것이었다. 단 오페라는 새로운 음악이어야 한다는 단속 조항이 없어서 약속한 숫자대로 작곡해 내면 되었다.


로시니의 초기 오페라들, 특히 <탄 그레디>(1813)가 눈부신 성공을 거둔 이래로 로시니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고용되었다. <세비야의 이발사>(1816)와 <신데렐라>(1817)가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자 로시니는 세계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바르바자가 1822년 빈 오페라를 인수했을 때 로시니를 그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고용했다. 빈의 귀족들은 곧 이탈리아 오페라의 열풍에 굴복했다. 일부 민족주의적 비평가들이 '외국의 침공'에 반대하면서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1821)를 옹호하고 나섰지만 허사였다.


로시니의 빈의 여세로 1823년 런던에서 5개월간 국제적 명사 대접을 받았다. 로시니의 일거수일투족이 런던의 언론에 보도되었고 그의 음악에 대한 대중의 요구는 식을 줄 몰랐다. 런던 내의 3대 오페라 극장, 즉 킹스 시어터, 드루어리 레인 극장 시어터, 코번트가든의 시어터 로열이 로시니 오페라에 대한 폭발적 수요에 발맞추어 재빨리 로시니 오페라를 공연했다.


파리 이탈리앵 극장

로시니가 오페라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곳은 파리였다. 1824년 그는 프랑스 왕실이 통제하는 파리의 3대 극장인 파리 오페라, 오페라 코미크, 이탈리앵 극장 중 이탈리앵 극장의 음악 디렉터가 되었다. 로시니는 아주 수익 높은 계약을 체결했다. 두 편의 오페라를 쓰고 프랑스 법률 아래 프랑스 시민이 보장받는 것과 동일한 저작권을 로시니에게 부여하는 조건이었다. 그 당시 프랑스 저작권법은 유럽 전역을 통하여 보호 범위가 가장 강력한 법률이었다. 로시니가 음악감독으로 근무한 6년 동안 이탈리앵 극장은 유럽의 선두 오페라 극장 중 하나가 되었다.


그 극장의 관객석인 살 파바르는 하나의 생활공간이었다. 오로지 이탈리아 레퍼토리만 공연하는 이 극장은 우아한 사교의 장으로서 오페라 열광 팬과 진진한 음악 애호가와 지식인들이 드나드는 곳이었고 좀 더 시끌벅적한 관객이 출입하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살 르 펠레티에(Salle Le Peletier)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여류 소설가 조르주 상드,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 등이 이탈리앵의 단골 고객이었다. 프랑스의 낭만 중의 음악가 중에서 글루크 파인 신봉자인 베를리오즈만이 이탈리아 오페라를 숭배하는 것을 경멸했다. 파리의 다른 오페라 극장에서는 청중이 공연 도중에 서로 대화할 수 있었지만 이탈리앵 관객은 입을 다물고 오로지 공연에만 집중했다.


파가니니의 사업가적 관점

리스트나 파가니니의 순회공연 정도가 주연 디바의 금전적 성공과 겨우 비교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파가니니의 괴이한 외모와 악마적 성격, 여성편력, 연주를 통해 청중에 미치는 마법 같은 힘 등에 대한 소문으로 티켓값은 더욱더 올라갔다. 그는 바이올린 연주 여행을 사업가의 관점에서 접근했고 '비밀장부'에 수입과 지출 명세를 꼼꼼하게 기록하게 했다. 그는 연주회 매니저를 고용하여 대리인으로 근무하면서 각종 비용을 관리하게 했다. 그 대신에 공연 수입의 일부를 그에게 주었다. 이것은 음악계에 하나의 혁명이었다. 전에는 작곡가 자신이 공연장소 물색, 신문광고 게재, 오케스트라 섭외, 티켓 대리인 고용 등을 챙겼다. 그는 자신만의 판촉물을 개발했는데 파가니니 얼굴 판화, 파가니니 케이크, 콘서트 기념품 등을 판촉물로 사용했다.


리스트의 자본축적 목적 순회 여행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이런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리스트는 1823~1824년 유럽을 순회하면서 십 대 신동으로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을 자아냈다. 이 조숙한 피아니스트 얼굴 판화는 파리 매장에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아버지가 사망 후 연주여행을 그만두고 피아노 교사로 생계를 꾸린다. 1831년 그는 파가니니가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효과, 떨림, 비약, 활강 등 흉내 내는 새로운 종류의 피아노 레퍼토리를 준비했다. 그리하여 '대가의 연주회'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1839년부터 1847년까지 스페인에서 시작하여 포르투갈, 폴란드, 터키, 러시아에 이르는 유럽 전역의 순회 여행을 떠나 높은 수익을 올렸다. 예전의 작곡가들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후원자를 얻기 위해 순회공연을 했지만 리스트는 자신의 순회 여행이 자본-리스트가 쓴 말-을 축적할 목적으로 떠난 사업 여행으로 생각했다. 그는 가에타노 벨로니라는 대리인을 고용했고 금전 출납과 여행과 관련된 리스트의 공공 이미지를 함께 관리했다.



1843년 유럽. 철도시대가 도래하면서 오페라가 유럽 전역에 퍼져 소통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후원을 얻기 위한 연주에서 자신의 실력으로 계약을 맺는 사업가적인 예술가들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음악계의 나폴레옹이라지만 오페라의 시즌에 따라 짧은 시간에 작곡해야 했던 로시니, 바이올린의 대가지만 연주회 매니저를 고용해 효율성을 높이고 자신만의 판촉물을 개발한 파가니니, 파가니니의 행보를 따라 순회공연을 사업 여행으로 계획한 리스트. 음악 관련 예술가들을 접하면서 그들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소설책을 읽는 듯 내용 전개가 흥미로워 앞으로 읽는데 무리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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