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기종 화가들의 풍경화
얼마 전 둘째와 함께 학교에 제출할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을 다녀왔다. 동네에서 엄마들 사이에 괜찮은 사진관이란 말을 듣고 미리 전화 후 방문했다. 머리를 정리하고 사진사 아저씨의 센스 있는 진행으로 5분 만에 촬영이 끝나 인화가 될 동안 잠시 앉아서 기다렸다.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을 보며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과는 다른 어딘지 모를 전문가의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여러 장 중 이 사진이 괜찮겠다며 추천해 주셔서 바로 인화를 하고 학교 제출용을 파일로 받기로 하고 집으로 왔다. 예전에 비해 더 빨라지고 인화 사진 개수도 비용도 많이 저렴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 <유러피언>에서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사진 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발명 초기에는 예술품이라기보다는 기록의 수단으로, 런던의 대박람회 때는 과학과 기술의 범주로 분류되던 사진 기술이 문학뿐 아니라 시각예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대해 알게 된 내용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진 제작법 발명
새로운 복제 기술은 일반인에게도 부담 없도록 사진 비용도 저렴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1851년 새로운 습식-콜로디온(사진 습판의 감광판)-의 발명으로 한 장의 원판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복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품질이나 비용 면에서 다게레오타입(사진 이미지를 반들반들한 유리 은판 위에 입혀서 단 한장의 사진을 만들어내는 복잡하고 값비싼 사진 법)에서 훨씬 진보된 사진 기술이었다. 3년 뒤인 1854년 프랑스 발명가 앙드레 디스 데리는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사진 제작법을 발명했다. 그것은 네 개의 렌즈와 하나의 회전하는 뒤판을 가지고 유리판 원화 위에 사진 이미지를 여러 번 노출하는 방식이었다. 사진 원화를 잘라내어 명함카드 크기에 올린 증명사진은 인기가 아주 좋아서 디스데리는 그 가격을 중산층 가정도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1840년대에 한 장의 초상사진 가격은 10프랑에서 50프랑 사이였는데 1850년대에 이르러 디스데리의 증명사진 12장이 겨우 20프랑이었고 1860년대에 이르러서는 2프랑으로 뚝 떨어졌다. 파리에서 1850년대 초에 사진관 숫자가 39군데였는데 18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200군데 이상으로 늘어났다. 런던에서도 비슷한 증가세를 보였고 1860년대 초에 이르러 약 4억 장의 명함판 사진이 해마다 영국에서 판매되었다.
대규모 사진 제작이 가능해지자 유명 인사, 가족, 개인 독사진 등의 초상사진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초상사진은 개인 자신을 저명인사들과 같은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그것은 사진이 가진 매력의 일부였다. 사진관은 유명 인사들의 사진을 홍보용으로 사용했고 또 그런 사진들이 사진관에서 팔리는 명함 사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디스 데리는 <현대인의 갤러리>라는 초호화 앨범을 1861년에 내놓았다. 120명의 저명인사 사진을 명함판으로 만든 것으로 폴린 비아르도 사진은 69번째 사진이었다. 당시 나폴레옹 3세와 빅토리아 여왕은 이 새로운 수단의 홍보력을 알고 상업적 이미지를 위해 사진기 앞에서 포즈를 취한 최초의 유럽 국가수반이었다.
사진 기술이 문학에 미친 영향
소설가들은 좀 더 시각적인 글쓰기 스타일을 개발했고 시각적 이미지와 외부 묘사가 충실한 문장을 구사했으며 시각적 묘사를 위하여 열린 문이나 창문 등 시각적 효과를 도입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황량한 집>(1853)의 첫 시작은 사진 같은 (시각적) 리얼리즘의 좋은 사례였고 귀스타브 플로베르도 거의 강박적일 정도로 자신의 문장을 시각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독자들에게 사물을 보여주는 것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작품에 삽화 넣는 걸 강하게 거부했다. 심지어 엠마 보바리는 하얀 손톱, 맨살 등에 맺힌 땀, 그녀의 작은 발 라인 등 아주 사소한 인상착의에 의하여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제시되었다.
리얼리티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은 이런 세부사항들의 무작위적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과거의 작가들은 이야기의 상징적 의미와 중요성에 따라 실제 같은 세부사항들을 선택하고 배치했는데 그 수법은 풍경화 화가가 그림 같은 효과를 창출하기 위하여 자연의 여러 요소를 적절히 배치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플로베르 같은 리얼리즘 작가는 사진을 찍을 때 일부러 배치하는 사물 같은 우연한 세부사항들로 텍스트를 채웠다.
사진 발명이 풍경화에 미친 영향
화가들 역시 '일상생활'의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사진의 등장은 시각 예술에 있어서 진실성의 한계를 높였다. 사람들이 사진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장식 없는 현실의 완벽한 재현, 귀중한 순간의 기록, 마치 그곳에 있는 듯한 사실적 느낌들이었다. 이런 사진 요소가 현대 미술의 미학에도 도입되었다. 사진의 영향은 이제 재현이라는 낡은 아이디어에 도전을 걸어온 것이었다.
사진의 영향으로 화가들은 그들의 작품에 사진 같은 정밀성을 부여해야 할 필요가 생겼고 그래서 많은 화가가 좀 더 나은 리얼리티를 얻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카메라를 사용했다. 에르네스트 메소니에의 아주 자세한 장르 그림은 다게레오타입을 너무 닮아서 여러 미술 평론가가 사진을 그림 그리기의 출발점으로 여긴다고 비난했다. 한 비평가는 1851년에 카메라가 화가의 스튜디오에서 '비밀병기'로 사용될 수 있지만 그것을 남용하면 '예술을 죽일 위험'이 있다는 지적을 했다. 예술은 사진 같은 정밀성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에 크게 의존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졸라에 의하면 일반 대중은 사진 같은 정밀성을 좋아하고 그래서 메소니에가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말한다.
루이 비아르도도 "만약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데 그치는 것이라면 가장 완벽한 그림은 잘 만든 디오라마(그림의 광경이 착각으로 인하여 입체적으로 보이게 한 요지경 혹은 영화 촬영에 사용하는 큰 장면의 축소 세트)가 될 것이며 가장 완벽한 조각상은 왁스 모델이 되어야 할 것이라 했다. 보들레르는 상업적 압력이 시각예술의 '사진화'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했다.
바르비종 마을의 새로운 회화 기술
화가들은 16세기 이래 그림 그리기의 보조 수단으로 카메라 암상자를 사용해왔다. 그러나 사진이 발명되면서 그들은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좀 더 과학적인 방식으로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풍경화에서 그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산진이라는 새로운 수단을 예술의 한 형태로 확립하고자 하는 사진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상은 풍경이었다. 그림과 사진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풍경화 작가들은 주로 퐁텐블로 숲에 있는 한마을인 바르비종에 몰려들었다.
1836년 살롱전 심사위원들로부터 거부당한 테오도르 루소도 그곳을 찾아왔다. 1840년대에 이르러 많은 수의 화가가 그 마을에서 여름을 보냈다. 디아즈 같은 화가는 농민의 오두막을 빌려서 사용했고 밀레, 투루아옹, 도비니, 쿠르베 등 대부분의 화가는 오베르주 간(Quberge Ganne)이라는 여인숙에 머물렀다. 오베르주 간은 일종의 화가 아지트가 되었다. 루소와 밀레는 1850년대에 들어와 아예 그 마을에 눌러앉았다.
새로운 회화의 기술의 핵심은 자연으로 나가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젤을 야외에 설치해 놓고 실제로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었다. 과거 낭만파들처럼 풍경을 이상화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비 서정적인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다. 야외 회화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유화를 제작하기 위해 오일로 야외 스케치를 하는 것은 수 세기 동안 해오던 것이다. 그 스케치는 완성된 작품으로 생각되지 않았고 스튜디오에서 마지막 최종 손질을 해야 했다. 야외 회화에 대한 태도는 19세기 초 몇십 년간 자연에서 직접 유화를 그리는 쪽으로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화가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림으로써 색깔과 명암의 자연스러운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존 컨스터블은 그것을 실천한 첫 번째 화가였다. 영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그가 프랑스에서 호평을 받고 살롱전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바르비종 화가들은 컨스터블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야외 그림에 대한 바르비종 화가들의 관심은 미국 발명가이자 아마추어인 존 랜드의 마르지 않는 튜브 페인트의 발명으로 더욱 높아졌다. 화가들은 오일 페인트가 마르는 것을 걱정할 필요 없이 마음껏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랜드가 발명한 튜브는 회화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치약과 다른 크림들을 담은 용기로 널리 활용되었다.
스튜디오로부터 해방된 바르비종 화가들은 숲과 들판으로 나가서 자연으로부터 직접 그림을 그렸고 빛과 그림자의 미묘한 효과를 적절히 포착했다. 그들은 같은 장소에 여러 번 되돌아와서 다른 계절, 하루 중 다른 시간, 다른 날씨 아래 작업했다. 이 화가들의 그룹에 귀스타브 르 그레이, 아돌프 강드귀욤, 샤를 마르빌, 콩스탕 뒤티외, 아달 베르트 퀴벨리에 등 일련의 사진가들이 합류했고 이들이 찍은 퐁텐블로 숲의 풍경은 1859년의 살롱전에 예술작품으로 인정된 최초의 사진이 되었다. 이들 사진작가는 대부분 클리셰 베르라는 사진 기법을 실험했다. 이것은 예술가가 콜로디옹이 코팅된 유리 판에 어떤 디자인을 새긴 후에 그것을 감광지 전면에 놓고 햇빛에 노출하는 기법이다. 이는 명암의 미묘한 대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 기법에 매혹된 밀레, 코로, 도비니, 루소 등은 이 새로운 수단을 활용했고 그들의 그림에 영향을 미쳤다.
화가 보호 구역 퐁텐블로 숲
철도는 바르비종 화가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었다. 1849년 퐁텐블로 노선이 개통되자 파리에서 주말 여행객들이 밀려왔다. 하루 만의 외출로 매력적인 왕궁을 둘러보고 아름다운 숲의 경치를 만끽할 수 있었다. 1850년부터는 행락 열차가 이 노선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 당일치기 여행에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도 있었다. 바르비종의 화가 집단 주거지는 방문객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간 여인숙의 찬장 패널과 칸막이벽에는 데생과 채색 스케치들로 덮여 있어서 일종의 박물관으로 만들고 기이한 구경거리가되었다.
1852년 루소는 모든 화가들의 이름으로 루이 나풀 레옹에게 탄원서를 보내 퐁텐블로 숲을 관광산업으로 보호해 달라고 호소하였고 10년 뒤 프랑스 정부는 숲 속의 일정 구역을 화가 보호구역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 화가들에게 많은 구매자를 데려오고 또 그들의 이름을 널리 알려준 것은 바로 관광산업이었다.
사진 기술의 등장으로 문학과 회화의 리얼리즘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튜브 페인트라는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인해 퐁텐블로 숲에서의 바르기종 화가들의 풍경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철도의 발달로 인해 관광객들이 바르기종 화가들을 널리 알렸다는 이야기 또한 내일 전개될 장기 기차여행에 대한 부분에 대한 것이라 기대가 된다. 내일 또 마저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