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기도
처음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을 때 한 손으로 쿵 딱 거리는 나와는 달리 상급생 언니들이 양손으로 건반을 누르는 게 신기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엘리제를 위하여' '소녀의 기도' 같은 명곡들의 연주를 들을 때면 건반 위를 자유자재로 다니는 언니들이 부럽기만 했다. 나도 언제 가는 멋진 곡을 연주할 수 있을 거란 기대로 더 열심히 레슨을 다녔던 것 같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소녀의 기도'를 처음 연주했을 때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책 <유러피언>에서 이 곡이 폴란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테클라 바다르체프스카 바라노프스카가 만든 곡으로 19세기 여성들이 즐겨 작곡했던 음악, "살롱 음악"의 예로 소개되었다. 오늘은 당시 여성 음악가 들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19세기 음악대학교육
대부분의 콩세르바투아르(음악대학)에서 여학생은 작곡과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음악대학에 입학한다고 해도 남학생들과는 별도의 교육을 받으며 장래에 연주자 난 교사로 활약하는 데 필요한 가수와 피아니스트 훈련을 받는다. 설사 여학생들이 하모니를 교육받는다 해도 남학생들보다 수준이 낮게 가르칠 뿐이다.
파리 콩세르바투아르에서 여학생은 1859년부터 연주자를 위한 건반 하모니 교육을 받는 것이 허용되었고 작곡 하모니를 교육받게 된 것은 그로부터 20년 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유럽에서는 브뤼셀과 라이프치히의 딱 두 군데 음악대학만이 여성들에게 작곡과 입학을 허용했다. 물론 자식을 열심히 후원하는 집안은 개인 작곡 훈령을 받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집안은 꽤 드물었다. 음악적으로 재능이 있는 딸들은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도록 권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자들의 전유물로 생각되는 작곡을 해보라는 권유는 하지 않는다.
파니 멘델스존 (1805-1847)
어린 시절의 파니 멘델스존은 남동생 펠릭스 멘델스존만큼 재주가 뛰어나지 못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이미 십 대 시절에 8 중창곡과 <한여름 밤의 꿈>의 서곡 등 초기 걸작들을 작곡해 냈다. 파니는 조숙한 재능을 가진 건 분명했지만 남동생만큼의 격려는 받지 못했다. 남매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펠릭스만 음악교육을 받게 하면서 교육비를 냈다. 아버지는 파니가 15세일 때 이런 편지를 딸에게 보냈다. " 음악이 네 남동생에게는 작업이 될 수는 있으나 너의 경우는 장식용일 뿐이야" 이런 방해 요인들로 파니는 그녀의 첫 번째 소곡들을 발표하면서 정체를 숨겨야 했다. 그것은 세 편의 가곡이었는데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작품 번호 8과 9) 그녀가 작곡가라는 사실은 1842년에 가서야 밝혀졌다.
클라라 슈만(1819-1896)
클라라 슈만은 자기가 작곡한 최초의 가곡들은 남편 로버트와 공동명의로 발표했다. 그 노래들은 어떤 것이 클라라의 것이고 어떤 것이 로버트의 것인지 알지 못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천재인 남편의 그늘에 가려서 클라라는 자신의 작곡 능력에 대하여 강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여자는 작곡하겠다고 마음을 먹어서는 안 돼. 그걸 해서 성공한 여자가 없어" 그 무렵 그녀는 여러 편의 피아노곡과 한 편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해 놓은 상태였다. 그녀 이름으로 발표한 작품에 대해 예의 바른 논평이었지만 한 수 아래로 보는 시각이었다. 평론가들은 그녀의 지위가 '여류 작곡가' 임을 지적하면서 피아노곡과 실내악곡 같은 소곡들에 집중할 것을 권유했다. 여자들은 교향곡이나 협주곡 같은 대작은 작곡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1846년 슈만은 그녀의 G단조 피아노 삼중주곡(작품 번호 17)의 특정 소절에 대해서는 칭찬하면서도 " 이것은 여성의 작품이고 그런 만큼 언제나 힘이 부족하고 때때로 창의성이 부족하기도 하다"로 평가하는 바람에 클라라는 주눅이 들어 자신감을 완전히 잃었다. 그때부터 더 이상 작곡을 하지 않았다.
폴린 비아르도(1821-1910)
폴린은 음악대학에서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10대의 폴린을 안톤 라이하에게 보내 작곡을 공부하게 했으나 그녀의 훈련은 대규모 곡을 쓰는데 기본적 기술인 대위법과 악기 편성 법 직전에서 끝났다.
폴린은 사망할 무렵 수백 편의 곡을 작곡해 놓은 상태였다. 이 곡들은 음악의 카논(정전)으로 포함되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생존 당시에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50년 그녀의 <10곡의 노래>에 대해 쇼팽은 스페인 풍 노래를 칭찬했다. 조르주 상드와 마찬가지로 쇼팽은 민속음악에 관심이었고 폴린이 그런 음악을 예술적 형태로 변용시켜 놓은 음악을 좋아했다. 리스트는 그녀가 '천재성을 가진 최초의 여류 작곡가'라고 생각했다. 폴린은 실제로 현재 전해지는 소나타를 작곡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한 세트의 소나타인 세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녀는 교향곡이나 협주곡은 쓰지 않았다. 규모가 큰 오페라 곡도 시도하지 않았다. 오페라를 써보라는 권유를 여러 번 받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자신감 부족으로 작곡에서 손을 뗐다. 그녀는 가곡과 피아노곡, 바이올린 소나타, 그녀가 바덴에서 투르게네프와 함께 작곡했던 살롱 오페레타 등 소규모 곳을 작곡하는 것이 한결 편했다.
살롱 음악
살롱 음악은 19세기에 여성들이 가장 즐겨 작곡했던 음악이었다. 그것은 대작을 작곡하는 데 필요한 작곡 기술을 공식적으로 훈련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아마추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창작 분야였다. 이것은 미술대학에서 누드와 역사화의 교육에서 배제된 여류 화가들이 풍경화와 초상화 등 '저급한' 그림 장르에 몰두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진지한 음악 평론가들이 볼 때 '살롱 음악'이란 곧 '여성 음악'과 동의어였다. 여성 음악이란 가정에서 소비되는 '저급한 형태'의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성들이 작곡한 대부분의 살롱 음악은 발표되지 않았고 그 작곡가는 오랫동안 이름이 잊혔다.
테클라 바다르체프스카 바라노프스카(1829? 1834?~1861)
가정용 음악은 커다란 시장이었고 일부 여류 작곡가들은 그 장벽을 뚫는 데 성공했다.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테클라 바다르체프스카 바라노프스카도 <처녀의 기도>라는 노래로 큰돈을 벌게 되었다. 이 노래는 원래 바르샤바에서 출간되었으나 슐레징어의 <파리 음악의 리뷰와 가제트>의 증보판으로 다시 발간되었다. 좋은 효과를 내지만 피아노로 반주하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이 곡은 20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베스트셀러로 남았다. 하지만 그 무렵 이 노래는 시골의 평범함을 상징하는 대표적 노래가 되었다. 그라하여 안톤 체호프의 희곡 <세 자매>의 마지막 장에서 모스크바로 떠나는 이라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나는 더 이상 '처녀의 기도'는 듣지 않아도 되겠군요" 이리나가 말하는 동안에 정원에서 거실로 그 노래의 달콤한 멜로디가 흘러들어 왔다.
루이즈 파랑(Louise Farrenc, 1804-75)과 루이즈 베르탱(Louise Bertin 1805-1877)
여성이 대곡을 작곡하는 데 있어서 장애물을 극복한 예외적인 인물들이다. 파랑은 오케스트라 곡을 베르탱은 오페라를 작곡했다. 하지만 이들은 상당한 혜택을 누리고 있었고 가문의 지원을 받았다. 파랑은 저명한 예술가들은 대대로 배출한 뒤몽가 출신인데 아마추어 작곡가였다가 악보 출판인으로 변모한 남자와 결혼하여 남편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작곡을 해보라는 격려를 받았다. 베르탱의 아버지는 영향력 높은 <주르나 데 데바>의 편집인이었다. 두 여류 작곡가는 어릴 때부터 작곡 레슨을 받았다. 파랑은 폴린을 가르치기도 했던 라이하에게서 공부했더 베르탱은 벨기에 평론가 겸 작곡가인 프랑수아-조제프 페티에게서 공부했다. 파랑의 초기 곡들은 슈만 같은 평론가의 호평을 받았고 그녀의 첫 번째 서곡은 베를리오즈의 칭찬을 받았다. 그녀는 1842년 파리 콩세르바투아르의 피아노과 정교수가 되었으나 그녀의 오케스트라 작품은 아주 드물게 공연되었다. 파랑의 사후 3년 뒤에 페티는 이것이 여류 작곡가들의 어려운 문제라고 설명했다. 콘서트를 개최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데 여류 작곡가들은 콘서트 주최 측의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기 공연 없이는 대규모 작품을 악보로 출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여류 작곡가들이 주요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또 남자와 동등한 카논(정전)을 작곡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당시 상황들. 재능, 세련미, 우아함을 발휘한다는 평을 받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쳐 꽃을 피우지 못한 여성 음악가들. 음악 지식이 깊지 않은 당시의 청중이 어떤 작품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이 작곡가의 지명도도 한몫했다는 것도 여류 작곡가들에게 심리적인 압박감도 상당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소녀의 기도'라는 곡을 연주하며 이유 없이 가슴 뛰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책을 읽었지만 당시 여성 음악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씁쓸하다. 둘째가 작곡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유심히 보게 된 부분이었다. 아무튼 아이에게도 19세기 여류 작곡가들 얘기를 해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