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없는 땅

섬나라 기질 강한 나라, 영국

by 꽁스땅스

얼마 전 런던에서 8개월간 장기 체류하며 쓴 홍인혜 작가의 에세이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를 읽었다. 아직은 가보지 않은 도시라 읽으면서 영국이라는 나라, 런던이라는 도시에 대해 간접 체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기억에 나는 건 런던의 우울한 기후, 냉담한 영국인의 기질, 동네 주민의 사랑방 같은 펍 문화. 런던의 뮤지컬, 그리고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이 제일 인기 있는 장소로 꼽힌다는 것에 깊이 공감하고 박물관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걸 납득하게 되었다는 저자의 이야기였다.


책 <유러피언>의 저자 올랜도 파이지스는 19세기 영국인들은 자신이 유럽인, 아니 다른 모든 외국인보다 우월하다고 확고하게 믿었다고 했다. 당시 영국인들의 섬나라 정신이 정치적, 문화적 측면에서도 대륙의 유럽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는 것이다. 특히 영국인은 문학에 강점이 있으나 20세기초 엘가가 음악계에 등장하기 전까지 단 한 명의 위대한 음악가, 작곡가, 연주자도 배출하지 못했다는 게 통설이었다고 했다. 오늘은 19세기 영국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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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의 자신감

영국이 대의 정부, 법치의 전통, 경제발전 등으로 모든 유럽 국가의 선망 대상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유럽인 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영국의 국민적 정체성의 핵심 부분이었다. 영국인이 자신감을 느끼게 된 것은 유럽의 국가들(특히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 승리, 대영제국의 세계정복, 최초의 산업국가라는 영국의 지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지리적으로 대륙에서 떨어져 있는 영국은 자신들의 특별한 캐릭터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 자부심은 오랫동안 정복되어 본 적이 없는 섬나라, 오래된 '영국식'자유에 대한 긍지, 그리고 '가톨릭 유럽'과는 구분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국인들의 이런 신화 속에서 가톨릭 유럽은 도덕적으로 낙후되고 압제적인 지역으로 오해되고 있다.


매콜리 경은 그의 저서 <영국의 역사>(1848-1861)에서 영국의 역사를 마그나카르타에서 현대의 입헌군주국에 다다르기까지 꾸준히 진보해 온 역사라고 파악하면서 입헌군주제야말로 사회적, 정치적 진화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인의 섬나라 정신

영국인들은 머리의 <여행 안내서>를 들고 단체로 관광했고 현지 주민들과 거의 소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보기에 너무 낯선 것(가령, 가정 내에서 일을 조직하는 방식이 다른 것)은 즉시 비판했다. 특히 유럽인의 생활 중 하수도와 배관은 커다란 비난의 대상이었다. 영국인들은 19세기 중반의 수십 년 동안에 이 분야에서 엄청난 성취를 거두었고 그 어떤 유럽 국가도 영국의 기준에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존 머리의 스위스 <여행 안내서>(1846)에는 " 심지어 1급 여인숙에서조차 배수와 환기 시설은 미비하고 통로와 계단은 비위생적이고 고약한 냄새가 난다. 여인숙 주인에게 이런 미흡한 시설이 영국인이 청결 사상에는 얼마나 견디기 어렵고 역겨운 것인지 조심스럽데 알려주어야 한다. 비위생적 시설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영국인들은 유럽을 여행하면서 유럽이 도덕적으로 낙후되어 있다는 그들의 생각을 확인했다. 헨리 메이휴는 <독일의 생활과 습속>에서 이렇게 썼다. " 저자는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해왔다. 영국에서 남쪽으로 여행하는 것은 시간상으로 퇴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위도가 10도 낮아지는 것은 액 1백 년에 해당한다. 가령, 프랑스에서 우리는 금세기(19세기) 초에 영국에 만연했던 부패하고 불편한 사회 상태를 지금 발견하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시민들이 누리는 문명의 이기와 사회적, 가정적 진보가 우리보다 1세기나 뒤떨어져 있었다. 반명에 스페인 사람들은 중세 시대에 살고 있다. 그곳은 지저분하고 정신적으로 암흑 상태이며 우리 땅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직전에 발견되고 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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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인 관점에서의 영국

영어는 세계를 지배했고 그 문학은 너무나 풍성하고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영국 독자들은 해외 작품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영국은 해외문학을 그리 많이 수입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영국의 도서출판업은 번창하고 있었고 대륙의 그 어떤 언어보다 영어로 발간된 책이 더 많았다. 그런 만큼 외국문학에 대한 수요가 그리 많지 않았다. 1870년에 영국 출판업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겨우 2.88%에 불과했다. (반면 스칸디나비아,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해외문학이 전체 출판 도서의 거의 절반을 차지, 프랑스조차도 약 12%가 번역서였다)


영국인은 해외문학을 별로 읽지 않았지만 그 대신에 유럽의 그림, 오페라, 음악은 대륙의 그 어떤 나라보다 많이 수입했다. 문화적으로 볼 때 영국인은 그들 자신이 인정하는 것보다 휠씬 더 유럽인들에게 의존했다. 영국은 국부가 풍성했기 때문에 영국에서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것보다는 유럽에서 가장 좋은 예술 작품들을 수입해 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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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의 런던 음악계 장악

런던의 부는 청년 헨델이 그 도시에 눌러않은 18세기 초부터 외국의 작곡가와 음악가들 끌어들이는 자석 역할을 했다. 작곡가와 음악가는 대륙에서 몇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을 단 한 번의 런던 시즌에 벌어들일 수 있었다. 헨델은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여러 해 동안 그의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를 가지고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외국에서 태어난 음악가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음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무리 영국인들이 자기 자신을 유럽인과 구분되는 또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들은 문화적으로는 유럽인들에 의존했다. 19세기 세 명의 이민자가 영국 음악가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영국을 유럽 음악의 지도 위에 올려놓는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 태생의 지휘자 마이클 코스타(Michael Costa 1808-1884)는 1830년에 런던으로 건너와서 50년 이상 활동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좌석 배치를 바꾸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엄격하게 훈련했으며 바통을 이용한 단독 지휘자 체계를 도입하여 공연 수준을 높여 놓았다.(전에는 악단의 지휘권이 제1바이올린 주자, 음악 디렉터, 마에스트로 알 쳄발로 등 삼분되어 있었다)


독일 태생 지휘자 아우구스트 만스(August Manns 1825-1907)는 1855년부터 1901년까지 수정궁 콘서트의 지휘를 맡았다. 영국 콘서트 레퍼토리에 다양하고 폭넓은 신곡들을 포함했고 찰스 스태퍼드, 에드워드 엘가, 아서 설리번 등 젊은 영국 작곡가들을 지원했다.


독일 하겐 태생 찰스 할레(Charles Halle 1819-1895)는 카를 할레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고 1840년대에 쇼팽, 리스트, 상드, 폴린과 루이 비아르도 등과 교류했다.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활약하였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완주한 최초의 피아니스트였다. 1859년 맨체스터로 옮겨가서 할레 오케스트라를 설립했고 자우무역 홀에 여러 건의 콘서트를 성사시켜 영국의 오케스트라 연주 수준을 더욱 높여 놓았다.


런던의 부는 그 도시를 유럽 오페라 산업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 만들었다. 우수한 가수들은 모두 런던을 방문했다. 다른 유럽의 도시들보다 훨씬 높은 출연료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1847년 이르러 런던에는 3대 주요 오페라 극장이 있었다. 여왕 폐하의 극장(Her Majesty's Theatre 베르디 오페라 <마스나디에리> 초연), 코번트 가든에 있는 로열 이탈리안 오페라, 드루어리레인에 있는 시어터 로열이다. 1860년대에 런던 지하철이 처음 개통되었고 런던 교외로 나가는 철도 노선이 부설되었기 때문에 오페라 사업이 끌어들일 수 있는 가망고객들은 더욱더 많아졌다.


유러피언 6.2 엘가.jpg 에드워드 엘가


음악이 없는 땅

영국 사람들은 그들의 음악성 열등성을 깊이 인식했다. 음악잡지에서는 왜 자국 출신의 유명한 작곡가가 나오지 않느냐고 자주 논의가 벌어졌다. 외국인들은 그런 현상을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 있었다. 폰타네는 영국인들이 과연'음악의 귀'를 가지고 있는지 의심했다. 그들은 아주 '평범한 음악'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술집이나 뮤직홀에서 즐겨 그런 음악을 찾는다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의견은 런던을 자주 방문했던 독일 작가 오스카 슈미츠(Oscar Schmitz)가 <음악이 없는 땅>에서 했던 말이다. 영국인은 상업적 실용성과 상식, 친절함, 유머들 여러 가지 미덕을 갖추고 있으나 딱 한 가지 음악성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영국인은 그들 나름의 음악이 없는 유일한 문화 종족이다(뮤직홀에서 부르는 소곡들은 예외). 내가 그들 교유의 음악이 없다고 한 것은 영국에서는 그 어느 나라보다 외국 음악이 많이 공연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귀가 소리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그래서 전반적으로 내면적 생활이 빈약하다는 뜻이다. <유러피언> p607


책에서 폴린 부부는 영국인이 답답하고 냉담하고 오만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특히 폴린은 그들의 음악성 부족, 유행과 지명도 추구, 그들의 '나쁜 취향'을 계속 칭찬해 달라고 요구하는 태도 등에 짜증이 났다고 했다. 쇼팽도 이와 유사하게 영국인은 음악보다는 돈에 대한 감각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유럽인들과는 달리 강하고 냉정하고 엄격한 영국인들. 그들이 예술적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건 국가경계를 뛰어넘는 문화적 이동과 최초의 산업국가로서 탄탄한 국부가 뒷받침이 되어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복되지 않은 대영제국이라는 자부심에 뿌리를 둔 강인함뒤에 문화적 소통의 흐름에 관대하고 예술가들과의 느슨한 유대를 형성했기에 영국내에서 유럽문화가 꽃을 피울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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