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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l 15. 2016

마음의 끝

  여자가 남자에게 말했다.


  - 찬기파랑가를 아세요?


  남자는 십여 년 전쯤, 고등학교에 다닐 때 고전문학 시간에 배웠던 것은 기억났지만 그것이 향가인지 고려가요인지, 시조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찬기파랑가, 자체가 무슨 내용과 의미를 가졌는지 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고전문학 시간에 배웠던 것이라는 게 떠올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협소설이나 SF소설이냐고 되물을 뻔 했으니 말이다.


  -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배운 것 같은데, 너무 오래되어서 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여자는 남자가 당연히 몰랐을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바로 말을 이어갔다.


  - 신라 충담사가 지은 향가에요. 기파랑에 대한 인품을 찬양하는 내용이라고 배웠을 거예요, 아마. 왜 우리 중고등학교 국어시간이나 문학시간에는 문학작품을 조각 조각 내어서 분석을 하잖아요. 정말 작가가 이런 의도로 썼을까 싶을 만큼. 보랏빛 하늘은 소녀의 우울한 심경을 드러낸 거고, 길에서 멀리 떨어진 조약돌 몇 개는 정체성에 대해 방황하는 소년의 심경을 은유한 거고, 창가에 드리워진 나뭇가지 그림자는 세속적 유혹에도 불구하고 고매한 성품을 표현하는 거라고 배우잖아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사실 좀 지겨운 기분이 들었다. 밤 11시. 여자는 오늘도 이 애매모호한 관계를 이어나갈 것 같았고, 남자는 새로 산 드로우즈의 밴드가 조여오는 것 같았다. 몇 번의 데이트를 했지만 여자는 그다지 호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법 대화도 잘 통하고,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것도 오래 만난 친구처럼 죽이 잘 맞았다. 심지어 책장에 책보다 건프라 조립해 놓은 게 더 많다는 말에 남자는 여자에게 더 흥미가 생겼다. 여자는 남자의 깨끗한 셔츠가 마음에 들었다. 혼자 자취한지 10년이 넘었다는 남자는 빳빳하게 다린 셔츠를 자주 입었다. 퇴근 후 바로 데이트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주말에 린넨 셔츠를 입을 때도 옅은 다림질 향이 났다. 남자는 여자의 책장이 궁금했고, 여자는 남자의 옷장이 궁금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길을 걸을 뿐이었다. 대화에는 농담이 없었고, 산책에는 그늘이 없었다.  

  여자는 국문학과를 다닌 덕분에 그 지겨운 분석을 대학에 와서 4년 내내 했고, 석사를 밟으며 2년을 더 했다고 푸념처럼 말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절개, 지조, 애상, 충신 따위와 전혀 상관이 없는 화장품 브랜드에서 마케팅 업무를 하고 있다고 했다. '솜사탕을 닮은 오후'라는 컬러를 추측하기 어려운 네일명을 만들었고, '반짝여서 설레는 밤'이라는 향가보다 알송달송한 아이브로우를 출시하여 마케팅을 진행했다고 했다.

  남자는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기자였다. 지구과학이 싫어 문과에 진학했지만 그의 출입처는 환경부와 기상청이었다. 지진 발표를 기상청에서 한다는 것도 기자가 된 후에야 알았다. 그러나 일출과 일몰 시각 발표는 한국천문연구원에서 한다는 걸 안 뒤에는 출입처를 바꿔달라고 하고 싶었다.  

  금요일 밤, 조도가 낮은 그 와인바의 마감시간은 12시었다. 계산서를 들고온 웨이터는 여자에게서 카드를 받아들고 카운터로 갔다. 남자는 꺼냈던 지갑을 어색하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 술은 제가 샀어야했는데요. 


  남자는 다음에 자신이 사겠다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몇 번을 만나도 여자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다음이라는 말이 여자에게 부담이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 있잖아요, 찬기파랑가에 그런 구절이 있어요. 마암의 갓할 좇누아져.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는 순간, 웨이터가 영수증과 카드를 들고 돌아왔다. 여자가 영수증을 확인하고 가방에 카드를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재킷을 집어들고 일어선 순간 취기가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가만 생각해보니 저녁을 먹으며 반주를 하고, 둘이서 와인을 세 병이나 마신 뒤였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휘청였다. 여자가 휘청인 건지, 남자가 휘청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여자는 남자에게 밤을 같이 보내자고 말했다. 남자는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해 문이 열릴 때까지 여자에게 키스를 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여자는 남자의 딱딱한 침대에서 남자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 아까 한 말있잖아요, 찬기파랑가.


  남자는 묵직하게 선 페니스가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찬기파랑가라니, 그 놈의 찬기파랑가. 망할 향가.


  - 아까하고 했던 말의 뜻이 뭐냐면요, 마음의 끝을 따르겠다는 거였어요.


  마음의 끝. 남자의 단단한 끝이 여자에게 닿는 밤이었다.




사랑과 사람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쓸쓸하지도 외롭지도 않지만

위로가 필요한

어느날의 당신에게

닿는 이야기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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