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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29. 2016

연애의 이해

  그녀는 언제나 많은 것을 이해하려고 애써왔다. 그를 만날 때도, 그와 헤어진 후에도, 그를 그리워할 때도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했다. 예를 들면 그가 약속도 없이 찾아와 그녀의 선약을 취소하게 했을 때, 그녀는 그가 그녀를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감격하여 그의 무례아닌 무례를 이해하였다. 그가 부탁했던 자료를 그녀가 애써 찾아 그에게 전해주었을 때, 그는 이제 필요 없어진 자료라며 차갑게 말했지만 최근 연구 실적을 가지고 상사에게 호되게 깨졌기 때문이라고 그의 퉁명스러움을 이해했다. 그의 가난도, 그의 학자금도, 그의 불안한 직장도, 그의 불친절함도, 그의 손찌검도 그녀는 이해를 했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은 자꾸 늘어갔지만 그녀는 그것을 이해해야만 했다. 이해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더 이상 어리지 않은 나이가 되었고, 모든 것을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해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연애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오늘 저녁에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리라 생각했다. 회사에 반차를 내고, 부천으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다. 출장이 아닌 일로 평일 오후에 버스를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의 오피스텔에 가기 전, 롯데마트에 들려 면봉, 칫솔, 치약부터 수입 맥주, 오다리, 꾸이꾸이까지 샀다. 두 손이 무거웠지만 오피스텔 1층 편의점에 들려 생수 2팩을 주문하고, 짐을 집에 올려놓은 후 다시 내려와 생수를 들고 올라갔다.
  그녀는 냉장고에 생수와 맥주를 채우고, 화장실에 있던 그녀의 칫솔을 버렸다. 선반에 새로사온 치약과 칫솔을 넣고, 옷장을 열어 페브리즈를 뿌렸다. 옷장에는 그녀가 선물한 셔츠가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차있었다. 빈 생수병을 분리수거했고, 담배꽁초가 담겨있던 블루 다이아몬드 캐슈넛 캔은 뚜껑을 닫아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빨래를 했다. 드럼세탁기 앞에 무릎을 당기고 쪼그려 앉아 세탁물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비로소 복잡했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건을 두 번 탁탁 털어 건조대에 널었다. 한 쪽이 사라진 양말, 잘 때 입는 낡은 회색 티, 그녀가 싫어했던 트렁크 팬티, 두 장의 손수건이 건조대에 나란히 걸렸다. 그리고 그녀는 손바닥만한 핑크색 레이스 티팬티를 그 옆에 걸었다. 이제 그 속옷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해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과 대상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헤어지자는 그녀의 말에 짧게 알겠다고 했다. 이미 짐작하고 했지만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탄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톨게이트를 지날 무렵,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오열하며 그녀에게 전화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녀는 집 현관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물끄러미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쉽게 열 수 있다면 그리고 쉽게 돌릴 수 있다면 그와 있는 무심한 풍경 속에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쉽게 돌아가는 그리고 너무 쉽게 열리는 문을 보며 그녀는 꼭 맞는 열쇠가 야속해져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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