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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29. 2016

사랑의 정의

  순식간에, 느닷없이 사랑에 빠져버리는 일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아마 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남은 일생 중에. 
  사랑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정교하지도 않고 섬세하지도 않다. 오히려 투박하고 볼품없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것이 사랑인가, 싶을 때 툭-하고 삶을 관통하며 일상 속에 커다란 구멍하나를 내어놓는 것이다. 그 구멍은 오늘에서 내일로 뻗어있는 신작로 같은 것이어서 우리는 그 안을 무언가로 채우고 싶어하고 그것이 사랑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따금 거침없기도 하며, 발작하기도 하고, 평소에는 마시지 못하던 높은 도수의 술을 마시게 된다. 사랑에 빠지면 그동안의 삶속에서 보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는 가까운 친구뿐만 아니라 일평생 나를 기르고 지켜보아온 부모조차 생소한 포즈를 하고 있다.
     
  그날은 나의 데이트를 몇 번이나 거절했던 당신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당신은 그 전에 총 3번 나를 거절했다.
  첫 번째는, 가볍게 영화를 함께 보는 것을 거절했고, 이유는 이미 보았다는 거였는데 좀 의심스러웠지만 넘겼다.
  두 번째는, 당신이 밤 중에 페이스북에 커피 한 잔 하고 싶은데 주변에 누구 없냐고 글을 올렸을 때였다. 좋아요,를 누르며 댓글에 ‘저 지금 갈게요!’라고 쓰자마자 다시 게시물로 올라온 맥심커피였다. 절묘하게 어긋났지만 찝찝한 기분은 지울 수가 없다.
  세 번째는, 6시 반쯤 당신이 퇴근했느냐며 전화를 걸어왔다. 회사와 집에 도보 5분 거리였던 나는 이미 퇴근해서 스타킹을 벗는 중이었다. 방금 들어왔는데 나갈 수 있다고 말하며 한 손으로는 스타킹을 다시 올려신었다. 잠시 망설이던 당신은 그냥 다음에 보자고 했고 나는 스타킹을 허물처럼 벗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 입구를 올라가며 주체할 수 없는 설렘에 나는 당신을 보면 먼저 무슨 말을 할까 생각했다. -세상에, 지금 이 문장을 쓰면서도 나는 그날 지하철역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당신의 옆모습을 떠올리니 아직도 설렐 정도야.- 벽에 기대어 휴대폰을 보고 있는 당신의 팔을 잡으며
 
  - K.
     
하고 불렀다.
  당신의 시선이 휴대폰에서 당신을 잡은 내 손으로 그리고 내 얼굴로 옮겨왔다. 아주 짧은 순간의 움직임이었지만 나에게는 슬로우 모션처럼 기억에 남는다. 
     
  - 금방 왔네요. 배는 안 고프고?
  - 배고파요. 
  - 뭐 좋아해요?
  - 면류 먹고 싶어요.
     
  우리는 작은 우동가게에 들어갔다. 우동을 주문하고, 반주를 할까 하다가 술은 따로 마시자며 웃었다. 그리고 K는 웃으며 말했다.
     
  - 나 선물 있는데.
     
  그렇게 무심한 척은 다하더니 선물이라니. 새삼 감격했다. 당신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시나리오 북이었다. 당신이 보았던 거라 그런지 접힌 곳도 있고, 모퉁이는 닳아있었다.
     
  - 촬영 다 끝났거든요. 내가 보던 거니까 소중히해야해요.
  - 이제 그럼 좀 덜 바쁜 거예요? 
  - 후반 작업이 있으니까 두고봐야죠, 그런데 전보다는 시간이 날 거예요.
  - 다행이다. 사인해줘요, 제일 앞에.
     
  당신은 웃으며 표지를 펼치고 내 이름을 써넣었다. 그리고 한 줄의 글을 써주었다. 
     
  ‘행복하시죠?’
     
  처음 받아보는 선물이었다. 그저 나를 생각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행위보다 서로가 없을 때에 서로를 생각하는 것에서 사랑을 더 크게 느끼는 지도 모른다.
  아주 평범하고 조용한 밤이었다. 손을 잡은 것도 아니었고, 포옹을 하지도 않았다. 그 밤에 당신이 내 앞에 있는 것이, 내가 당신의 눈을 보는 것이 더 이상 상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감격스러웠다. 그동안의 연애나 짧은 만남들 속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고, 지나쳐왔던 감정의 크기와 방향성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모든 사랑이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면서 감정의 영역이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지와 삶이 얼마나 밀도 있게 깊어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주 먼 시간에 다다랐을 때에도 나는 아주 정확하게 당신을 기억할 것이라 믿는다. 당신이 놓여있는 풍경은 무섭도록 반짝이며 내 생을 관통하고 있노라고 다시 만날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K, 굳이 내 사랑의 정의를 내리자면그건 당신 이름일 거라고 나는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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