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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29. 2016

세컨 핸드

  여자  이거 테스트해볼 수 있어요?
  남자   네?
  여자  오븐 테스트해볼 수 있냐고요.
  남자   이 오븐이요?
  여자   네. 전에 제가 밥솥을 샀었는데 고장 났는지 밥만 하면 물이 잔뜩 고이더라고요.
  남자   그러니까 지금 말씀은 이 오븐을 여기에서 테스트 해보자는 거예요? 홍대입구 7번 출구에서?
  여자  저희 집이 여기에서 가까워요. 베이킹 재료도 다 있고, 사실 이제 오븐에 넣기만 하면 되는 발효 중인 크로와상이 있어요.
  남자   저기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저 이 오븐 그쪽한테 팔 생각이 없어요.
  여자  그러면 왜 들고 나오셨어요? 홍대입구 7번 출구에?
  남자   그게 말하자면 좀 복잡한데요
     
  남자가 들고 있는 오븐 위를 툭툭 치며 여자가 의아한 듯 다시 물었다.
     
  여자   깎아달라고 안 할게요. 그리고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남자   그런데 처음 보는 남자한테 막 본인 집에 가서 오븐 테스트를 하자고 하는 거예요?
  여자  예열이 잘 되는지, 빵이 잘 구워지는지 알아야 사죠. 크로와상을 굽고, 시식까지 딱 삼십 분이면 충분해요. 바쁘지 않으니 화요일 오전 10시에 이렇게 나오신 거 아니에요?
  남자  네, 그럽시다. 얼마 줄 건데요?
  여자  이쪽으로 와주셨으니까 당연히 2만 5천원이죠. 그런데 제가 구운 빵 드시고 오븐 안 판다고 마음 돌리시면 안 돼요.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사실 중고나라 카페에서 직거래하는 거 좀 불안했는데, 의외에요.
     
  여자가 먼저 성큼 걷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자의 걸음에 맞춰 가볍게 흔들리는 포니테일 머리를 보다 안고 있던 오븐을 내려다보았다. 빨간색의 미니오븐 위로 오전의 햇살이 떨어졌다. 아침을 먹지 않아 배가 고팠고 여자가 크로와상이라는 단어를 꺼낸 순간 남자는 크로와상이 먹고 싶어졌다. 결코 여자의 짧은 트레이닝 반바지 아래로 쭉 뻗은 하얀 다리와 목이 늘어나 늘어진 티셔츠 때문에 보이는 깊은 쇄골 때문이 아니었다. 
     
  여자  오븐 예열될 동안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남자  크로와상에 어울릴만한 거라면.
  여자  크로와상에는 초콜릿 프라페죠. 그런데 그런 건 집에 없어요. 집에 물 아니면 술이에요. 
  남자  그럼 왜 물어봤어요?
  여자  마실 건지 안 마실 건지 물어본 거예요.
     
  테이블에는 여자의 말대로 굽기만 하면 될 것 같은 크로와상 반죽이 있었다. 롤링을 꽤나 잘한 크로와상으로 보였다. 작은 오피스텔 안은 달콤한 버터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 오늘 하루는 일진이 정말 사납다고 생각했다. 하루를 이렇게 완벽하게 망쳐버리는 방법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끔찍했다. 하지만 여자가 말을 건 순간 알았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쪽 문이 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여자   미니오븐이라서 두 개 밖에 못 넣겠네요.
     
  여자가 크로와상을 팬에 올리며 말했다. 반죽은 아직 여섯 개나 더 남아있었다. 
     
  남자   맛있어서 오븐이 아니라 크로와상을 가지고 가고 싶으면 어떡하죠?
  여자  기다려야죠. 제가 더 구울 때까지.
  남자  낯선 남자를 저 빵이 다 구워질 때까지 안 내보내도 상관 없어요?
  여자   제가 아직 낯설게 느껴지세요? 그러면 좀 아쉽네요. 
  남자   낯설지 않은 남자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에요.
  여자   위험한 건 처음 보는 여자 집에 따라온 그쪽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남자   한 마디를 안 지네요.
  여자   한 마디를 안 져주네요.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오븐에서 종료 알람이 울렸다. 여자는 온도를 200로 맞추고, 타이머를 13분을 맞췄다. 
     
  여자   이제 13분만 구우면 돼요.
  남자   그럼 13분 동안 뭐할까요?
  여자   뭐하고 싶으세요?
  남자  뭐하게 해줄 건데요?
  여자  여기에서 하고 싶은 거.
  남자  잘해요?
  여자  누구에게 가르쳐줄 정도는 하죠. 
  남자  그럼 지금 가르쳐줄래요? 배우고 싶은데?
     
  여자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사라졌고, 남자는 조금 전 자신의 말을 후회했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가 어젯밤에 갑자기 자신이 선물했던 것을 모두 돌려달라고 했다. 남자는 새벽 2시까지 그동안 받았던 것들을 박스에 차곡차곡 담았다. 
     
  남성용 슬립 타이 세 개, 이게 필요가 있을까? 뭐, 침대에서 종종 넥타이로 손을 묶어달라고 했으니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아이패드 2, 생일 선물이라고 온갖 생색을 내며 사줬지만 돈을 반반씩 냈으니 내 지분도 반 있는 거 아닌가. 일단 줘버리자. 아이패드 미니 새로 샀으니까. 라오스어 회화책, 이번 겨울에 라오스 여행 가자고 사준 선물. 비행기 티켓 끊기도 전에 헤어졌으니 이 책은 영원히 볼 일이 없겠군. 쓰다만 치약, 평소에 내 양말과 치약, 칫솔부터 아이패드까지 다 선물한 여자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다이소에서 파는 천 원짜리 생필품을 내게 이렇게 자주 선물했단 걸알까. 쓰던 거지만 달라니 줘야지. 세븐일레븐 요구르트 젤리, 어렵게 구했으니 아껴먹으라길래 정말 뜯지도 않았던 젤리다. 하나 먹고 돌려줄까했는데 모르겠다. 일단 주자. 캐논 50mm f1.8 렌즈, 인물 사진을 워낙 예쁘게 찍을 수 있어 여친렌즈라는 이름이 붙은 단렌즈다. 이 렌즈로 매일 같이 갈아치우는 인생사진 참 많이 찍어줬는데 이제 다 필요없구나. 구두, 프랑스 출장 갈 때 사준 닥스 구두다. 굽을 평생 무료로 교체해준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좋은 구두를 신으면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던 말을 조금 알 수 있게 해줬다. 고맙네, 이렇게 생각하니. 뭐야, 이렇게 하나하나 상기하며 자기를 추억이라도 하라는 건가. 나쁜 년, 다른 남자 생겨서 헤어지자고 해놓고. 박스에 구두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 엿 먹으라는 심정으로 박스를 들고나왔다. 그 위에는 빨간 미니 오븐을 얹어서. 이제는 엑스걸프렌즈가 된 그녀는 지하철역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남자를 보며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에게 물건들을 몽땅 안겼다.
     
  - 이제 됐냐?
     
  그리고 굉장히 쿨하게, 나름 멋있다고 생각하며 뒤돌았다. 그래, 이런 출근길도 있는 거지! 
     
  - 야- 야! 김선우!  
     
  남자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그녀가 잔뜩 화난 얼굴로 바닥에 박스를 내려놓고, 오븐을 집어들고 남자에게로 달려왔다. 주변에는 이미 구경꾼들로 웅성거렸다. 젠장,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사당역 오븐남 이런 걸로 올라오는 거 아냐?
 
  - 이 오븐, 사실 네 카드로 산 거였어. 그러니까 가져가.
     
  주변에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뒤돌아가서 박스를 들어올리는 그녀를 향해 남자가 오븐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 쌍년. 넌 진짜 끝까지 별로라서 고마워.
     
  그녀가 박스를 안고 총총총 사라졌다. 남자는 오븐을 안고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갔다.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내려야했지만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이 가장 없는 곳이 어딜까 생각했다. 아침의 홍대입구역이었다. 9번 출구도 아니고 7번 출구로. 사람은 정말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역 입구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때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 이거 테스트해볼 수 있어요?
라고.
     
  남자는 여자의 키스가 거칠어지자 솔직히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자  원래 중고거래 이렇게 해요?
  여자  저도 처음이에요. 보통은 아니지 않을까요? 왜요? 하지말까요?
  남자  아니, 아니. 좋아요. 계속해요.
  여자  그런데 원래 오븐 팔려고 나오신 거 아니죠?
  남자  음, 언제부터 알았어요?
  여자   7번 출구에서 당신이 나를 따라오던 순간부터.
  남자  어떻게?
  여자  그때 판매자에게서 문자가 왔거든요. 미안한데 홍대까지 못 온다고. 약속시간 다 돼서 매너 없게 말이에요.
  남자  그러면 왜 저를 여기까지 데려왔어요?
  여자  오븐이 필요했으니까요.
     
  여자가 남자의 셔츠 단추를 풀며 물었다.
     
  여자  그런데 정말 저 오븐 뭐예요? 평일 오전에 오븐을 들고 홍대입구역에 서 있는 남자를 우연히 만날 확률이 가능한 걸까요.
  남자   출근길에 옛 여자친구에게 쌍년이라고 소리 지르고 다른 여자랑 크로와상이 구워지는 동안 사랑을 나눌 그런 확률이랑 비슷하지 않을까요.
     
  진한 빵 냄새가 방안 가득 퍼졌다. 크로와상이 오븐 안에서 아주 맛있게 구워져갔고, 두 사람의 13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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