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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29. 2016

비 온 뒤의 달

  남자는 여자에게 농담 같은 진담을 자주했다. 휴가를 어디 갈거냐는 물음에는, 네가 가고 싶은 곳이라고 답했고,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말에는, 그냥 이렇게 네 연락 기다리면서 지낸다고 했다. 여자는 그의 말이 진담 같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밤까지 내렸다. 두 사람은 신림역 근처의 순대타운에서 요기를 하고, 신림역 7번 출구 근처에 있는 부산오뎅바에 갔다. 홀 중앙의 커다란 오뎅바 안에는 오뎅꼬치가 김을 피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늘 그랬듯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오뎅탕 중짜리를 하나 시키고, 새우튀김을 주문했다. 술을 언제나처럼 마루였다. 빨간 바탕에 붓으로 그린 듯한 흰 동그라미가 프린트된 마루는 다른 사케들 보다 도수가 낮아 남자가 좋아하는 편이다. 13.5%니 일반 소주보다도 다소 낮은 편이다. 사케는 보통주, 혼죠조, 쥰마이, 긴죠, 쥰마이긴죠, 다이긴죠, 쥰마이다이긴죠로 나뉘는데 여자는 도정률이 높은 쥰마이다이긴죠를 좋아했다. 물론 당연히 마루보다 도수가 높은 간바레 오또상이나 쥰마이다이긴죠를 마시고 싶었지만 술이 자신보다 약한 남자를 생각해서 마루를 마셨다. 요이비진이 아닌 것을 그저 감사하면서.

  바삭한 새우튀김을 먹으며 두 사람은 잔을 기울였다. 남자는 잔을 꺾었고, 여자는 깨끗하게 비웠다. 남자는 여자의 잔을 채워주기에 바빴고, 여자는 잔을 비우는데 바빴다. 여자가 남자보다 빨리 많이 마셔도 취하는 건 남자 쪽이 먼저였다. 여자는 이 일에 대해 친구들과 심각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 남자가 늘 먼저 취하는 건 대체 무슨 의미야? 술만 마시면 내가 늘 택시 태워서 보낸다니까? 보통 남자들은 여자가 먼저 취하길 바라지 않아?

  여자의 물음에 엊그제 애인과 헤어진 친구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 그냥 술친구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여자는 오늘 그래서 확인하고 싶었다.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건지. 매일 저녁 통화를 했고, 메시지도 하루에 여러 번 씩 주고받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만났으며, 최근에 본 신작 영화는 모두 함께 보았다. 하지만 손을 잡는다거나 집에 데려다주는 일은 없었다. 서로에게는 남편 혹은 아내가 없었으며, 연애 중인 것도 아니었다. 여자는 사귀자는 말을 하자고 할까 고민하다가, 어쩌면 남자는 이게 사귀는 중일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하는 섣부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굳이 고백 같은 게 없이 연애를 하는 나이에 접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뭔가 분명히 하지 않으면 친구 말대로 술친구가 될 것만 같았다. 술을 좋아하는 여자는 술친구가 생기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그와는 하고 싶지 않았다. 만나기 전에 새로 생긴 주점을 검색해보고, 새로 수입된 맥주의 정보를 공유하는 일은 인문학 모임을 가장한 동호회에서 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 있잖아요, 오빠는 왜 연애 안 해요?

  여자의 물음에 남자는 빈 잔을 흔들었다. 방울소리가 나는 듯했다. 여자는 남자의 잔에 사케를 채웠다. 찰랑이게.

  - 그러는 너는 왜 연애를 안 해?

  남자의 물음에 여자는 약이 올랐다. 괜한 술기운에 남자의 잔을 빼앗아 단숨에 들이켰다. 

  - 저는 바빠서 연애를 못해요.

  남자가 여자의 입에 새우를 넣어줬다. 여자는 오물오물 꼬리까지 먹으며 남자에게 물었다.

  - 오빠는 언제할건데요?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게 답해줘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불안해졌다. 남자는 자신의 잔에 사케를 따라 한 잔 비우고 나서야 말했다.

  - 너 안 바쁠 때.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뎅바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우산도 얼추 말라있는 걸 보니 비가 그친지 좀 된 것 같았다. 여자는 사케를 하나 더 주문했다. 우고노츠키 핫탄니시키 쥰마이다이긴죠. 
  우고노츠키雨後の月는 비 온 뒤의 달이라는 뜻이다. 도쿠리 잔에 달뜬 여자의 얼굴이 달처럼 하얗게 떠올랐다. 달이 밤하늘에도, 둘의 깊은 곳에도 가득 차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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