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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29. 2016

페티쉬

  그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그녀는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오자마자 구두를 벗어서 쓰레기통 입구로 밀어넣었다. 좁은 입구는 그녀의 구두를 삼키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쓰레기 통 위에 올려놓았다. 빨간색 굽이 달린 검은 에나멜 구두가 쓰레기통 위에 있는 모습은 너무 이질적이었다. 맨발의 그녀는 빗물이 곳곳에 고인 길을 레인부츠라도 신은 양 걸어갔다. 어깨를 펴고, 턱을 내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 구두를 벗어버리고 싶었다. 좋은 구두를 신으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던 동화같은 그 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왕자가 있는 성으로 그녀를 이끌고, 콩쥐의 꽃신이 그녀를 원님에게 이끈 그 이야기들 때문인걸까.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를 신고도 왕자와 근사한 춤을 출 수 있었고, 콩쥐의 꽃신은 대체 얼마나 예뻤길래 원님은 꽃신의 주인을 찾아 아내로 맞이한 걸까.

  K는 백화점에서 그녀에게 검은 에나멜 구두를 사줬다. 굽은 촌스러울 만큼 깊은 빨간색이어서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 굽만 이렇게 빨간 구두라니. 출근할 때는 도저히 신을 수 없을 것 같은 구두인 걸?

  - 출근할 때 신으라고 사주는 거 아니야.     

  다른 구두를 집어드는 그녀의 손을 쳐내며 K는 말을 이었다.     

  - 이 구두는 침대에서만 신어줘.     

  어떻게 들으면 K의 사생활을 의심할 수 있는, K의 취향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시점이었으나 당시의 그녀는 K의 판타지를 모두 들어주고 싶을 만큼 그를 사랑했던 시점이기도 했다. K는 트렁크에 늘 그 에나멜 구두를 싣고 다녔고, 그녀와 모텔에 갈 때나 그녀의 오피스텔에 갈 때면 그 구두가 든 상자를 품에 꼭 챙겼다.

  - 오늘은 아무것도 입지 말고 구두만 신어줘.

  그리고 오늘, K의 말대로 그녀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구두를 신었다. 뒤꿈치가 쓸리는 느낌이었다. K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구두를 신고 서 있는 그녀를 오래 오래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쁜 가슴을 빨지도 않았고, 쏙 들어간 배꼽을 핥지도 않았고, 그녀를 촉촉하게 할 그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를 세워놓고 마스터베이션을 한 것도 아니었다. 구두를 신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그런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 무심하게 서서 K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만족스러운 키스를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K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던 그녀는 K의 요구를 모두 응해줄 만큼 그를 계속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K는 허탈한 그녀의 표정을 읽지 못했는지, 벨트를 풀고 바지를 조금 내려 자신의 페니스를 꺼냈다. 그리고 1분도 지나지 않아 사정을 했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속옷과 스타킹을 챙기고, 블라우스를 고쳐입고, 스커트를 끌어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맨살 위에 트렌치코트를 입고 쇼퍼백에 자신의 옷을 우겨넣은 후      

  - 개새끼.     

라는 말 한마디만 한 채 뒤돌아서 나왔다.     

  K의 마지막 한 마디는 그녀를 아프게 때렸다.     

  - 그 구두는 침대에서만 신는 거야.     

  그녀는 지하철을 타러 가면서 빠르게 걸었다. 대리석 바닥에 자신의 알몸이 비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발이 아팠다. 한 번도 부드럽지 않은 곳을 밟은 적이 없는 구두는 투정이라도 하듯 그녀의 발을 아프게 조여왔다.

  쓰레기통에 아무렇게나 구두를 버린 후에야 그녀는 어쩌면 왕자도, 원님도 신데렐라나 콩쥐를 사랑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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