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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29. 2016

소심한 스토커

  음, 그러니까 일단 제가 차인 건 맞아요. 제가 찬 건 아니거든요. 아? 본인이 차였다고 했다고요? 아니에요. 전 정말 차지 않았어요. 제가 찼으면 그때 그렇게 힘들지 않았겠죠. 저는 아직 휴대폰에서 번호도 지우질 않았는걸요? 다만 이름은 바꿔서 저장했어요. 그냥 이름 세글자만 저장했어요. 사실 그 전에도 뭐 서방이나 자기나 애칭 같은 걸로 저장해놓진 않았었어요.

  뭐였냐고요? 음, 웃지마세요.      

  - 국토교통부 김준구 사무관이요.      

  지금은 뭘로 바꿨긴요.     

  - 그냥 김준구죠.     

  아무래도 사내연애였으니까요. 사귈 땐 애칭으로도 저장을 못했고, 헤어진 후에는 헤어졌으니 애칭으로 저장 못하고. 그랬어요. 연애 초반에는 이름 부르는 것도 익숙하지 않아서 김 사무관님이라고 불렀어요. 사내연애는 정말 별로에요. 데이트를 하다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사업 꼭지들이랑 관련된 이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이건 연인 간의 대화가 아니라 업무 회의 수준으로 바뀌죠. 하, 그 사람은 정말 어느 정도였는지 아세요?

  동작구에 있는 보라매공원 아시죠? 보라매공원 옆에 보라매병원이 있어요. 그때 제가 보라매 병원 뒤에 있는 주택가에서 자취를 했거든요. 지금은 외교부 임기 끝나고 이직하면서 이사도 하긴 했는데, 그때 살던 곳이 좀 오래된 동네였어요. 저희 집 근처에서 만나기만 하면 꼭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지중화 공사가 필요하다고. 네, 지중화 공사요. 아, 지중화 공사가 뭐냐고요? 전선들 땅에 매립하는 공사요. 대로변이나 뭐 강남만 넘어가도 길에 전봇대가 없잖아요. 다 땅에 매립하니까요. 저희 집도 딱 그랬거든요. 보라매 병원 블록 뒤로만 넘어가면 그 사람 말대로 지중화 공사가 필요한 곳들이었죠. 하지만 거기가 언덕도 많고 주택가라서 이제와서 지중선을 매설하기에는 너무 대규모의 공사가 될 것 같은 동네거든요. 아무튼 그놈의 지중화, 지중화. 아니 공무원들은 원래 그래요? 세상에 뭐만 보면 정책 아이디어가 막 떠오르고 그러나? 아주 그냥 뼛속부터 그렇게 공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는 사람이었어요. 

  아, 다른 이야기로 빠졌네요. 아무튼 제가 차였어요. 차였는데 매달리진 않았거든요? 술 마시고 전화를 한다거나, 메시지를 보낸다거나, 페이스북에 구구절절하게 잘 할 걸 그랬다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글을 남기지도 않았어요. 그냥, 아주 조금 훔쳐보려고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페이스북 친구를 끊은 게 아니라 아예 차단을 했더라고요? 페이스북에 막 지중화 공사 필요한 곳 사진이랑 좌표 찍어서 올리는 사람이었는데 그게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를 끊었나 싶어서 이름을 검색해봤죠. 아, 왜 검색했냐고요? 아니, 뭐 헤어졌다고 하나도 안 궁금하고 그러신가봐요? 저는 전혀 아니던데. 궁금하잖아요. 어떻게 사는지. 근데 이름을 검색해도 안 나오는 거예요. 페이스북을 탈퇴할 사람이 아닌데, 페이스 북에 올린 지중화 필요 장소 스크랩해서 리포트 쓸 사람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그 사람이랑 저랑 공통으로 친구였던 사람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친구 목록을 봤죠. 근데 거기에 딱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의미인 줄 아세요? 네, 절 차단했다는 거예요. 아니 친구를 끊으면 되는 거지 왜 차단을 해요? 아무튼 그렇게 우회해서 그 사람 페이스북에 들어갔는데, 전부 친구 공개로 돌렸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도 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당분간 참고 지냈죠. 그러다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을 찾아봤어요. 평소에 쓰던 아이디겠거니 싶어서 찾아봤는데 그건 뜨더라고요, 그냥 뜨기만 했어요. 비공개더라고요. 인스타그램 비공개는 제가 팔로잉을 해도 상대방이 승인해줘야 게시물이 보이거든요. 하, 그래서 인스타그램은 하나도 못 봤죠. 혹시 인스타그램을 안 하는 건가 싶어서 매일 들어가봤는데, 게시물 숫자랑 팔로잉, 팔로워 숫자는 점점 늘더라고요. 그 숫자가 늘어갈 때마다 더 궁금해졌어요. 뭘 이렇게 올리나, 이것도 지중화 공사에 대한 거 올리나 싶어서.

  근데 너무 보고싶고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생각해낸 게, 그 사람이 대변인실에 있었다는 사실이었죠. 그래서 종종 언론 인터뷰도 하고 그랬는데, 구글링해서 인터뷰 자료들을 찾아냈어요. 그리고 그걸 계속 돌려봤죠. 한 15초정도 되는 인터뷰에서부터 방송에 나온 자료들까지 전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 목소리, 표정, 제스처 전부. 참, 비밀연애가 뭐라고 뭐가 무서워서 그 사람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어놓은 게 없었을까요.      

  아무튼 이렇게 말하고 나니 굉장히 스토커처럼 느껴지네요. 지금도 훔쳐보긴 해요. 번호 안 지워서 아직 카카오톡은 그 사람이 떠요. 메시지를 보내본 적은 없는데, 그냥 상태메시지랑 프로필 사진 바뀌면 그거 봐요. 다시 연락해보라고요? 에이. 다시 만날 거였으면 우린 안 헤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이 저를 다시 만날 생각이 있었다면, 헤어지자는 말도 안 했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거든요. 다행이에요. 내가 매달리지 않게 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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