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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13. 2017

뒷모습이 예쁘다

너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내게 입을 맞췄다

  청소를 하고, 냉장고 정리를 하고, 재활용품을 분리해서 버리고, 휴지통에 새 봉투를 씌우고 나서 소파에 깊이 몸을 묻고 앉았다. 창틈에 끼워진 종이가 보였다. 택배 박스를 작게 잘라서 끼워놓은 것이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유격이 맞지 않는 창에서는 휘파람 같은 긴 소리가 나곤 했다. 비 오던 날, 소파 끝에서 웅크리고 자던 네가 깨어서 잠에 취한 목소리 말했다.


  - 로렐라이가 불렀을 노래처럼 들려. 


  이불을 당기며 너는 창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커튼을 달지 못한 창에 네가 비쳤다. 창밖에는 라인강이 아니라 새벽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미혹되면 안 되니까 이 노랫소리를 안 들리게 해야겠다.


  너는 일어나서 신발장 위에 놓인 택배 박스 중 작은 것을 골라 작게 잘라내 창틈에 끼웠다.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기획서를 쓰고 있던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너는 의자를 당겼다. 의자에 달린 바퀴는 맥없이 너의 작은 힘에 밀려났다. 너는 내 무릎 위에 걸터앉아 내 목을 꼭 끌어안았다. 샤워를 하고 나서인지 옅어진 향수 냄새와 담배 냄새가 났다. 담배를 끊는다더니 아직 몰래 피우는 것 같았다. 너를 안고 싶었지만 이미 여섯 번째 고치고 있는 기획서는 너를 밀어내게 만들었다. 


  - 이거 써야해. 알잖아. 피곤하다.


  가느다란 팔이 집요하게 목을 끌어안았다. 너의 입술이 귓불에 닿았고, 혀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귓바퀴를 살짝 깨물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너를 안고 소파로 갔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짜증스러웠다. 이 기획서가 통과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너도 잘 알고 있었다. 통과되면 나는 런던으로 떠난다. 해외 지사 발령을 간절히 바랐고, 영국은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나라였다. 일본 발령이 미끄러진 후 더 온 신경을 곤두세워 준비하게 된 건, 단순히 영국 지사 발령을 바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이름조차 낯선 나라의 신규 지사도 아닌 신규 사무소로 가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와 갈 수 없겠지. 영국이라면 너와 결혼해서 갈 수 있을 것이다. 가족수당이 나올테고, 우리의 아이는 국제학교의 학비까지 지원받으며 그곳에서 자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하고 있는 유리공예를 명망있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장인에게 사사받을 수 있는 기회까지 열릴 것이다.


  - 이럴거면 그냥 집에 가. 안 돼.


  내 말에 너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내게 입을 맞췄다.


  -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높은 연봉을 받는 게 아니야.


  입술을 떼며 네가 말했다.

  나는 일부러 모질게 말을 내뱉었다.


  - 너는 모르잖아. 학자금 대출을 받아봤어, 아르바이트를 해봤어, 취업 준비를 해봤어? 넌 입시 실패하면 유학가면 되는 거고, 취업 안되면 갤러리 오픈하면 되는 거고. 세상에는 너처럼 쉽게 사는 사람 없어.


  질투같은 거였다. 너를 사랑하지만 학비 걱정 없이 유학까지 지원해준 너의 집안, 졸업도 전에 공방과 갤러리를 오픈해 관장이나 대표님 소리를 듣는 너를 조금은 미워했다. 너는 자랑하지도 내세우지도 않았다. 하지만 왜 그렇게 치열하게 사느냐고 묻는 듯한 너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괴로웠다. 하지만 핑계다. 네가 그렇다고 대충 살아왔다거나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네가 각종 공모대전에서 받은 트로피와 상패, 수시로 날아오는 해외 전시 초청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니 핑계다. 즐겁게 일하는 너를 보며 드는 내 자괴감을 위로하기 위한 변명이다.


  - 당신은 여전하구나. 이제 좀 행복해져도 되잖아.


  내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너의 가슴팍에서 기분좋은 향기가 났다. 울고싶어졌다. 

  영국행이 결정되었을 때, 너는 내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왜냐고 묻는 나에게 너는 말했다.


  - 당신이 그리던 미래에는 당신만 있잖아. 늘 내가 없었어. 그 내일로 당신 혼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네가 돌아서서 가는데 나는 그 뒷모습을 모면서 알았다. 나는 이 시간을, 이곳을 그리고 너를 잊는 것이 참 어렵겠다는 것을. 인파에 금세 사라진 그 뒷모습이 남긴 자취가 그대로 보였다. 달의 궤적처럼 슬프게.

 창틈에 끼워진 종이를 빼내었다. 아마 영국으로 떠난 뒤, 이곳에 이사 오는 누군가는 로렐라이의 노래 같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다시 종이를 접어 끼워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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