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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13. 2017

잔상, 사라질 시간에 대해

우린 다시 만나지 않아도 되겠죠

  - 몸은 곰, 코는 코끼리, 눈은 코뿔소, 다리는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대요. 

  - 뭐가요?

  - 맥이요. 

  - 정말 있었다고 믿는 거예요?

  - 당연하죠. 


  호기심이 어려있는 여자의 눈을 보면서 남자는 머릿속으로 전설 속 동물인 맥을 가만히 그려보았다. 사람들이 꾸는 악몽을 잡아먹는 전설 속 동물, 정말 존재했다 하더라도 지금 없으니 여자의 꿈을 잠재울 수는 없을 것이다.


  여자는 날개뼈 부근에는 반 뼘쯤 되는 크기의 드림캐처 문신이 있고, 베개 아래에는 걱정인형이 있다고 했다. 남자는 나쁜 꿈이 들어오지 못하고, 좋은 꿈만 거미줄의 구멍을 통과할 수 있다는 드림캐처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들의 나뭇가지, 동물의 힘줄 그리고 실로 만드는 드림캐처는 악몽을 잡아두었다가 아침의 태양에 모두 녹여버리고, 좋은 꿈은 아래에 달린 깃털들로 흘러 보내 꿈의 주인에게 머물게 한다. 남자는 여자의 등을 보며 잠이 들 때까지 토닥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악몽을 꾸고 싶지 않다는 소원,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문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몽 같은 그를 향한 마음을 밀어내고 싶지 않다는 조심스러운 꿈들을 걱정인형이 마술처럼 해결해주지는 못 한다는 것을 여자도 알고 있다. 남자는 부드러운 촉감의 침대 시트와 조금은 단단한 베개 그리고 그 아래의 걱정인형을 생각하며 여자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를 향한 마음은 사랑이나 동정, 연모나 연민이 아니었다. 거의 처절한 안타까움에 가까웠다. 여자를 처음 만난 건 여자가 오래 만나던 연인과 헤어지고 딱 보름이 되던 날이었다. 여자는 웃다 울다를 반복했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주 짧은 탄식을 내는 것이 전부였다. 


  - 우린 아직 헤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해요. 우리는 샴쌍둥이처럼 떨어지지 않아요. 영원히 함께 할 것만 같은 날들이 계속 돼요. 그런데 나는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심장이 빨리 뛰어요. 달리기를 마치고 난 뒤처럼, 빠르게 뛰어요. 절정에 다다른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요, 연아, 연아, 홍연.


  앞에 놓인 찻잔에는 이미 식어버린 차가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티백에서는 진하게 찻물이 우러나있고 여자는 차를 마실 생각이 없다.


  - 나는 심장이 계속 빨리 뛰다 결국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기절하듯 쓰러지고 말아요.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헤어지고 싶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앞에 있는 틴케이스에서 생초콜릿 몇 개를 꺼내 여자의 차받침에 올려주었다. 여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오늘 당신을 만나러 오는 길은 비까지 와서 더 쳐지는 기분이었어요. 이런 초콜릿으로 바뀔 기분이 아니에요.

  슬며시 미소를 짓는 남자에게 여자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남자는 다시 틴케이스를 열어 초콜릿을 자신의 입에 쏙 넣었다. 그리고 두 개를 다시 꺼내 손으로 잠깐 쥐고 있다가 찰흙을 빚듯 조그만 모양을 만들어냈다. 개미핥기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주둥이가 뭉툭한 개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 말레이 반도에 가면 맥이라는 동물이 있어요. 대충 이런 모양이죠. 오늘 약 대신 머리맡에 이걸 두고 자는 게 내가 해주고 싶은 처방이에요.


  자신의 앞으로 밀어준 조그만 초콜릿 덩어리를 보던 여자의 표정을 읽고 싶었지만 남자는 읽을 수 없었다. 여자는 그제야 차받침의 초콜릿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남자는 입 안에서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초콜릿의 맛을 여자가 흥미로워하길 바랐다.


  - 오늘은 그만 갈게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 다음 주 오늘 다시 만날까요?


  남자가 만든 맥을 입안으로 넣으며 여자가 대답했다.


  - 당신의 처방이 옳았다면 우린 다시 만나지 않아도 되겠죠.


  입술을 앙 다문 남자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여자의 표정을 그제서 읽어낼 수 있었다. 문을 닫고 나간 여자를 생각하며 남자는 모니터에 띄워진 차트에 마침표 하나를 찍었다.


  여자의 경쾌한 구두소리처럼 꿈속에서도 헤어진 그에게서 가벼운 마음으로 멀어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수면제는 여자를 잠들게 했고, 헤어진 연인을 만나게 했다. 하지만 초콜릿은 여자를 달콤하게 하고, 헤어진 연인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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