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의 일 이었습니다. 운 좋게도 영화 조커를 지인의 도움으로 공짜로 볼 수 있었죠.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걸 지켜보다가 집에서 VOD로 보게될줄 알았는데,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극장에 도착한 시간은 공교롭게도 00시, 바로 자정.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날이 바뀌는 그 순간, 하루의 모든것이 안녕을 고하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그 순간 영화는 시작했습니다.
1. 시작.
영화는 혼란스러운 고담시의 상황을 전달해주는 라디오 뉴스가 배경으로 깔린채, 아서가 광대 분장을 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분위기가 굉장히 묘합니다.
다크나이트를 통해 유명해진 조커라는 캐릭터를 모르는 관객이 있을까요? 조커는 스스로를 혼돈이라 칭하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당이고 심지어 이 영화의 제목은 정말 정직하게 "조커 " 입니다.
거기에 첫 장면부터 어떤 남자가 우리에게 친숙한 조커의 모습으로 광대 분장을 하면서 처연하게 눈물을 흘리는 오프닝씬이라니! 거기에 배경에는 처참한 고담의 현재상황을 읊어주는 뉴스 브리핑이! 아하! 조커의 눈물은 뭔가 회한의 눈물인 것일까? 거대한 악이 되어버린 나와 이 상황에 대한 복잡한 마음이 조커로 하여금 저런 묘한 눈물을 흘리게 하는것인가? 고로, 이 영화는 시작부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조커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 뒤 (화려한 볼거리로 우리의 시선을 붙잡아 둔 뒤) 과거로 돌아가거나 혹은 거기서 사건이 시작되는 그런 전형적인 블록버스터 방식의 전개인것일까?
라는 생각을 했던 내가 정말 부끄럽게도 영화는 아서의 처참한 현실을 여과없이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광대로 분장한 아서는 폐업을 앞둔 가게에서 광고판을 돌리며 호객행위를 하는데 그의 삶은 정말이지 순탄치 않습니다.
회색빛 도시속에서 혼자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무표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웃는표정의 광대 분장을 한 아서는 그 만큼 주변과 너무 이질적입니다. 최선을 다해 영업을 해보지만 역시 사람들은 그에게 작은 관심도 내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동네 아이들에게 광고판을 빼앗기고 두들겨 맞기까지 하죠.
엉뚱하게도 이때 그 아이들을 뒤쫓기 위해 뛰어가는 아서의 뜀박질에서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서 라는 캐릭터를 완성시켜주는 느낌이릴까요? 허겁지겁 본인의 생계수단을 되찾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최선을 다해 뛰는데 옷 때문인지, 신발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아서는 그렇게 뛰는것인지 그 어색하게 우당탕탕 뛰는 모습 하나로 이 남자가 어떻게 살았고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다 설명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단순하게 일직선으로 허겁지겁 눈앞의 무언가를 잡기 위해 뛰지만 단순한 트릭하나 피하지 못하고 광고판은 다 망가지고 길바닥에 웅크린채 흠씬 두들겨 맞는 아서의 모습을 보면서 회사에서 어떻게 보냈는지도 기억이 안나는 하루를 보낸 뒤 집에와서 이불속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흠씬 두들겨 맞은뒤의 조커... 마치 퇴근후 나의 모습 같다. 곧 그 처참한 몰골 위로 화면가득 타이틀이 뜹니다.
잊지마, 이 영화의 주인공은 조커라구!
그래! 이 영화는 조커가 주인공이었지, 영화는 그걸 잊지 말라는듯이 화면가득 글자를 채워줍니다. 아니, 이렇게 처량한 저 광대분장의 사내가 그 조커라고? 나랑 마주 앉아 세상살이의 고달픔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눈물 지을것 같은 저 사내가? 이렇게 영화는 성공적으로 관객인 나를 붙잡아두며 시작합니다.
2. 역설의 사내
보기만해도 고달픈 아서의 삶은 여기서 끝이 아니죠. 그는 노모를 홀로 부양하며 코미디언의 꿈을 키워하는 도시 하층민인데, 감당해야 하는 고난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가난한 살림에 노모를 부양해야 하고, 갑자기 시도때도 없이 터져나오는 웃음은 그를 사회적으로 고립되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그는 매 순간 긍정적으로 최선을 다하려 하죠. 그의 어머니는 처참한 현실을 겨우 견디고 있는 아들에게 아서라는 이름 대신 "해피" 라고 부르며, 의도치 않게 아서의 상황을 자꾸 환기시킵니다. 마치, 행복해질 수 없기에 "해피"라고 불리우는 역설의 사내가 되기를 강요하는 결과가 되어 버리죠.
어떻게 보면 "해피"라고 불리는 삶을 살고 있던 그 순간, 아서의 비극은 예견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독한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상담을 통해 혹은 이웃을 통해 인간적인 교류를 꿈꾸지만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며, 코미디언이 되고 싶지만 기회도 재능도 마땅치 않은채 나이만 먹어가고 있는 그는 도저히 해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너는 행복 그 자체라며 "해피"가 되기를 강요하죠. 아서도 그런 어머니를 모시며 희망을 가집니다. 유명 TV쇼에 우연한 계기로 방청객으로 갔다가 출연하게 되어 인생에 있어서 둘도 없을 극적인 경험을 하는 상상. 아서의 바램은 이토록 소박합니다. 다만 소박한 상상이거나, 거창한 꿈이거나 모두 아서의 삶 속에서는 이루어질리 없다는 사실이 슬플 뿐입니다.
TV쇼를 보며 상상할때도 그렇고 토마스 웨인(배트맨 브루스웨인의 아버지!)을 찾아갔을때도 그렇고, 아서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결핍을 크게 느끼고 거기서 본인의 삶의 새로운 돌파구와 희망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모두 실패하고 큰 좌절감과 충격만 아서에게 남기게 되는데, 아서의 아버지로 간주 혹은 상상되었던 인물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다는 측면에서 아서는 오히려 역셜적으로 본인에게 결핍으로 남겨졌던 존재인 아버지의 존재를 누군가로 채우기보다는 그것을 모두 지워버림으로써 본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즉, 비움을 통해 본인을 채워나가는 역설적인 선택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서는 그 존재 자체로 이미 세상에 다가갈수록, 멀어지고 평화를 갈구할수록 혼란을 야기하는 역설의 사내임을 영화는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여담이지만, 이쯤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한명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조커와 같이 역설로써 완성되는 매우 강력한 개성적인 캐릭터가 있었죠. 바로, '오.대.수.'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던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 오대수는 누군가에게 납치, 감금되어 긴 세월을 보낸 뒤 풀려나고 결국 복수에 성공하지만 본인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그 복수의 기억도 모든 진실도 다 지워버리기를 원하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뒤에서 더 이야기 하겠지만, 특히 폭력을 통한 구원, 복수를 꿈꾸었다는 점에서 오대수를 한국의 조커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다만 오대수가 당했던 가혹한 불법감금을 생각해보면 미치지 않고선 베길 도리가 없었을것 같기는 하네요, 조커는 태생적으로 세상과 반대의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사내이지만요.
오대수 같은 강렬한 캐릭터가 그립네요...
3. 폭력이 당신을 구원하리라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하고 인생의 막바지 궁지에 몰린 아서는 지하철에서 또 웅크린채 집단 린치를 당하게 되는데, 여기서 아서가 총을 쏴서 사람을 죽이며 영화는 본격적으로 다른 궤도에 올라탑니다. 아서는 거침없이 그리고 집요하게 자신들을 린치하던 사내들을 죽이는데 그 뒤 허겁지겁 현장을 벗어난 아서는 자신의 막혔던 혈을 뚫어낸듯 공원 화장실에서 춤을 추며 흥분에 휘말려 몸을 마구잡이로 흔드는것이 아닌 천천히 우아하게 자신의 내면과 교감하듯 몸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이웃 여자에게 거칠게 키스를 하죠. 아서는 그 강렬한 폭력의 경험으로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영화는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폭력을 통한 구원은 가능한가?"
방아쇠 당기듯 터져버린 아서의 내면은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그의 앞에는 더욱 깊고 어두운 비극만 존재할 뿐이었죠.
자신의 행위를 비웃고 비난하는 토마스 웨인의 인터뷰를 볼때의 아서의 눈빛은 토마스의 열렬한 지지자인 어미니 앞에서도 그 불쾌함을 감추지 않으며, 본인 과거의 진실을 알고 난 뒤 어머니를 죽이며, 그 사건으로 본인을 의심하고 뒤쫓는 형사들을 본인의 추종자들로 가득한 지하철에서 손쉽게 제압해 버립니다. 급기야는 집에 찾아온 옛 동료 이자 배신자를 거침없이 매우 잔인하게 죽이죠.
반복되는 폭력을 통해 그는 점점 대범해지고 완성되며 본인이 뿌린 작은 폭력의 씨앗이 사회 속에서 싹을 틔우고 그것이 거대한 하나의 흐름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조커로서의 정체성으로 찾아갑니다.
그는 폭력을 통해 새로운 존재 조커로 자아를 찾고 그렇게 구원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쉽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렇게 불우하고 힘든 성장배경을 지녔다고 해서 본인의 유일한 구원의 수단은 폭력이라는 것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그의 인생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면? 그의 존재 본질 자체가 결국 이렇게 될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면?
마치 영화 파이트클럽의 주인공 (에드워드 노튼)이 자신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어야 구원받을 운명이었던 것처럼, 그의 운명은 폭력이 유일한 구원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가 말하는 사회는 마지막으로 남은 변화의 원동력과 개인의 구원의 가능성이 결국 누군가가 뿌린 폭력의 씨앗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얼마나 암울한 시대인가요, 이 폭력의 씨앗은 계속 퍼져나가 이윽고 어린 브루스 웨인을 부모를 잃은채 홀로 어두운 골목에 남겨둠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더 어두운 씨앗을 뿌리기까지 합니다. (이 폭력으로 개화하게 되는 꽃이 나중에 배트맨이 된다는것이 유일한 위안거리 일까요 아니면 그 조차도 사회 구조적인 시스템이 만들어낸 영웅이 아닌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개인의 선의와 희생에 기대야한다는 점에서 더 서글픈 것일까요)
4. 진실은 무엇인가?
아서는 어머니로부터 본인이 토마스 웨인의 아들이며, 토마스와 본인은 허락받지 못할 사랑을 했기 때문에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서는 큰 혼동에 빠지지만 일말 기대도 가지죠. 직접 토마스와 마주하고 호소해 보지만 오히려 토마스로부터 본인의 어머니가 과대망상에 빠져 입양한 아서를 본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헛소리를 지껄인다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 얻어 맞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다 이럴 수 있냐는 아서의 절규는 간단하게 무시당하죠. TV에서 고담시의 시장이 되기 위해 번지르르한 말들을 늘어놓던 토마스는 아서 앞에서 비열하고 오만한 상류층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아서가 직접 병원에가서 실랑이 끝에 훔쳐서 나온 서류는 토마스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하는 서류였고 그 속에서도 아서의 어머니는 토마스의 음모임을 주장했지만 아서가 학대당했다는 새로운 진실이 밝혀지며 어머니의 주장은 힘을 잃습니다. 아서의 정신병이 어머니의 학대에서 비롯되었음을 그녀의 말은 모두 망상이었음을 알게된 아서는 어머니를 죽이게 되는데, 그 직후 아서 또한 이웃 여자와의 데이트, 교감이 모두 자신의 망상이었음을 알게 되고 혼란에 빠집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걸작 다크나이트에서 조커는 왜 자신의 입이 웃는 모양으로 찢어졌는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2번 이야기를 하는데 모두 이야기가 다릅니다. 당시에는 혼돈의 사도 (Agent Of Chaos) 라는 조커의 캐릭터적 특성을 강조하는 에피소드로 치부하고 넘어갔지만, 영화 '조커'를 보니 그 에피소드에서 결국 조커는 그 무엇이 진실이든 혹은 모두 거짓이든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향한 탐구를 인간의 당연한 본성, 추구해야하는 가치로 받아들이지만 아서플렉, 조커에게는 그저 자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학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누구의 아들이든, 입이 어떻게 찢어졌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합리적이고 절대적인 진실이란 나 조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되뇌이는게 편했겠지요.
결국 아서는 모두를 죽이러 TV스튜디오로 떠나기전에 어머니의 사진 뒷면 친필로 남겨진 토마스 웨인의 사랑을 속삭이는 글을 보지만 이제 진실이 무엇이 되었든 궁금하지 않다는 듯이 사진을 구겨버리고 집을 나섭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준비한 농담과 리액션을 실제 라이브쇼에서는 한번도 하지 않은 채 그토록 존경하고 인정받기를 원했던 진행자를 총으로 죽여버립니다. 세상에 자신을 맞추어 잘 어울려보려 노력했지만 한번도 제대로 응답받지 못했던 사내가 스스로 새로운 세상이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이 부분이 다크나이트의 조커의 전사를 듣기만 했던 경험이 시각적으로 풀어져 설명된것으로 보였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요? 조커는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 아서는 본인의 장애도 그 무엇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너는 이해못한다며 무시한다. 이렇게 그는 이제 설명할 수 없는 설명이 불필요한 혼돈 그 자체가 된듯합니다.
5. 끝난 뒤
조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것은 어떤 경험일까? 그리고 조커는 누구인가? 영화 조커는 철저하게 이 질문에 답을 하기위해 집중하고 나아갑니다. 결국 답을 얻어가는것은 관객의 몫이지만 질문을 놓쳐서 우왕좌왕 하는 영화는 아니기에 모두 각자의 해답을 안고 극장을 나섰을것입니다.
주인공을 옭아매는 상황과 연출, 음악 그리고 호아킨 피닉스의 엄청난 연기까지 (사람의 등을 통해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엄청한 경험을 하게 해주신다.) 마음을 계속 불편하게 옭아매고 놔주지 않는 영화 그 자체도 훌륭하고 조커라는 캐릭터의 우주를 확장한 좋은 영화였습니다.
사랑받고자 하였으나 미움을 얻었고, 선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지만 오해만 불러 일으켰던 불우한 한 남자의 이야기는 지금 수백년간 이어져온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최전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얼마나 관대하고 공정한가?
인생이 모두에게 아름다운 결말을 준비할 수 없다면, 우리는 노력으로 그 결말을 바꿀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것일까?
묵묵히 일상을 견디며 쌓아올린 인생이라는 그 긴 시간이 어느날 그저 막다른 출구없는 미로의 한 구석이었다는게 유일한 삶의 진실 이라면? 그런 사람들이 계속 늘어간다면? 그 순간 우리는 조커가면을 쓰게될까?
조커가 남긴 불편함과 찝찝함은 위의 질문들과도 닿아있을 것입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