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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루 Feb 12. 2021

Nothing never change.

이십대후반에 느끼는 인간관계에 대하여


새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손이 덩달아 바빠지던 때가 있었다. 평소에 감사하게 생각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보내기 위해서다. 카카오톡 채팅 목록을 손으로 올려보며 최근 대화를 나눈 사람 중 밀도있는 관계를 솎아낸다. 연락을 자주하진 않지만 떠올리면 마음이 든든해지는 고마운 존재들을 놓치지 않으려 저 밑 대화까지 내려가 본다. 그렇게 추려진 정예 멤버들에게 한사람씩, 마음을 담지만 너무 무게를 잡지 않는 선에서 인사를 건넨다. 올 한해도 덕분에 고마웠다고, 내년에도 잘부탁드린다고 말이다. 



주변인을 챙겨야 한다는 말


사람을 챙기는 데에 무조건적 강박을 가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어떤 영향을 주는지와 관계없이, 으레 해야하는 것으로 여기며 혈연이나 학연으로 묶여있는 사람들을 챙기곤 했다. 이는 관계가 내게 주는 영향이 거의 없다시피한 덕분이다. 나쁠 것이 없어서 미워하는 이들이 없었고 좋지도 않아서 베풀 마음이 없었다. 그러니 그리 쿨하게 으레 해야하는 의무(?)를 열심히 수행할 수 있었다. 주로 나의 자아가 강하고 목표가 뚜렷하다 못해 혈안이 되있던 때가 그러했다. 



남는 건 사람뿐이다


인생을 좀 더 살아보니, 내게 행복감을 주는 지속적이고 본질적인 것 중 하나가 밀도있는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경험을 해도 남는 것은 사람뿐이라는 말에 이른바 꽂혀버렸다. 가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힘이 되었고, 친구와 어울리는게 참 즐거웠다. 나를 살게 하는 것은 관계구나.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곧 삶을 살아가는 이유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능동적이고 선별적으로 사람을 챙기게 되었다. 진심이 담긴 새해인사를 정예멤버에게 보내는 것이 그때의 일이다.




사람때문에 살고 사람때문에 죽더라


이십대 후반에 접어들며, 정확히는 작년부터 거슬리는게 많아졌다. 사소한게 눈에 많이 보이고 마음이 쉬이 옹졸해졌다.  '응당 이래야하는 거잖아, 이사람은 왜 이러지?' 이해의 폭이 좁아졌다. 이전에는 '그럴수 있지'가 쉽게 됐는데 이제 아니다. 무엇이 원인인지는 모르겠다. 경험의 문제인지, 건강의 문제인지, 호르몬의 문제인지.


그러한 거슬림의 주요 대상은 단연 관계였다. 관계는 행복감만 주던 것이었는데 이로인해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좋은 관계가 안좋은 관계로 바뀌는 것은 한 끗 차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됐다. 행복을 줄정도면 밀접하다는 것이고, 기대하는 바도 많다는 것이다. 그 기대로부터 모든 파국이 시작되곤 한다. 기대하는 바에 못미치는 까닭에 작년 한해 오랜 인연을 여럿 잃었다. 밀접하지 않은 관계가 더 얕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인류애 상실?


이제 사람을 잘 못믿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와 영원히 좋을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이다. 평생갈 것 같던 친구사이가 예전같지 않고, 영원히 좋을 줄만 알았던 친척어른들이 돈으로 언성을 높인다. 그걸 알다보니 마음을 주는 것이 예전만큼 쉽지 않다. 상처를 받을까 움츠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만하지 못한이에게 순간을 좋자고 애써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꾸준히 못할 것을 알면 호의도 웬만해선 거둔다. 상대에 따라 얼마나 애써야할지 혹은 말아야할지 행동하기전에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눈뜨고 코베이기 딱좋다. 최소한 기분이 안좋은 상황을 맞닥뜨릴 확률이 몹시 높아진다.



그 중에서도 꽤 큰 변화를 맞은 관계가 있다. 떠올리면 언제나 저릿한 마음을 들게 하는 대상이었다. 그는 무조건적으로 내게 좋은 이였고 행복했으면 하는 사람이었다. 어렵다면 내가 기꺼이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상대도 나와 같은 마음임을 확신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헌데 이런 관계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간혹 상처를 받곤 했는데 이젠 용서가 잘 안되고, 권리를 찾게 되었다. 마음이 나와 다르진 않을까, 조심스러워졌다.



어떤 관계까지, 어떤 밀도로 이러한 회의가 지속될지 모르겠다. 내생의 소중한 것을 잃은 것 같아 서글프고 더 심해지면 어쩌지 겁이 난다.

나는 다시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까. 사람을 보면 꼬리를 냅다 흔들며 달려드는 리트리버가 다시 될 수는 없을거 같은데. 옛날 만큼은 아니더라도 소중한 관계에 좋은 마음을 끝까지 가져가고 싶은데 욕심인 것일까. 노력으로 회귀가 가능한 영역일까. 




Nothing never change.


이전에 관계에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편히 마음을 놓을 안식처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것이 영원하지 않음을 목도하고 여유가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순리겠다. 여유가 없어 사람을 놓치고, 사람을 놓치며 더 여유를 잃는다. 



나의 냉소는 어쩌면 이치를 알게 되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결같은 것은 우주에 없다는 이치말이다. 보살핌과 사랑에는 이유가 뒤따른다. 연인관계라면 이끌림, 부모자식관계라면 책임감 등의 이유로 무조건적인 관계임에도 유지가 가능했다. 허나 이것이 사라진 상황이라면 상호성을 필요로 하는 한낱 관계로 전락하는 것은 이상할 것 없지 않은가.


늘 받던것에 익숙한 나머지 변해버린 처지에 당혹스러움을 느낄 순 있겠다. 부모와 같이, 태어날 적부터 너무나 당연하던 상대면 더 그렇다. 허나 언제까지 자기연민에 빠져 넋놓고 앉아있을 여유가 없다. 


강해져야 한다. 나를 위해 나만이 영원하다

당연한 시선을 거두고 한 개체를 봐야한다. 그리고 노력해야한다. 


이를 인정하니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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