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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루 Jul 09. 2021

나를 이유없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십대 후반의 내가, 이십대 중반의 내게 건네는 인간관계론

4.나를 이유없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너무 눈치볼 것 없다

내 잘못이 아니다.




회사를 다닐 적 한달에 한번 꼴로 나를 묵직하게 부르던 이가 있었다.

'아무개씨, 일로 와보세요'

안그래도 조용하던 사무실에 별안간 내 이름이 울려퍼지는 날이면 오늘도 심상치 않은 하루겠구나 점쳐볼 수 있었다.

나를 부른 이는 우리 부서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 부서장이었다.


부서장이 부서에 온갖 티를 내가며 나를 불러다 놓고 하는 말은 대게 황당하기 따로 없는 것들이었다.

'왜 칼퇴를 하느냐'

'왜 아침밥을 먹었느냐' (회사는 아침밥을 무료로 제공한다)

'왜 이렇게 화장실을 자주 가느냐'

'왜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지 않느냐'

'왜 이렇게 책상이 지저분하냐'


유독 나한테만 그랬다. 다른 사람 다 아침밥 먹고 칼퇴하는데 나한테만 그랬다. 다 로비카페가서 커피사오는데 나만 안된단다. 그가 말단 사원이 오후내내 화장실 몇번가는지 세고 있는걸 알았을 땐 부서장의 할일이 그리 많지 않구나 알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자리가 더럽다고 혼내던 순간, 회사 정규복지인 자율출퇴근제를 나만 금지시키던 순간.

모든것이 확실해졌다. 이 사람은 그냥 나를 싫어하는 구나.


이유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절대 나를 왜 싫어하는지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화를 내고 혼내는(사회생활하며 성인이 성인에게 혼난다는 것도 참으로 충격적이긴 했다) 명분만 있었을뿐.

물론 그조차도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처음엔 나름의 항변을 붙여보았다. 이렇게 모든 사람 앞에서 혼날 정도면, 부서장님이 오해 한 부분이 있다는 걸 알려줘야할 것 같았다.

헌데 그의 화만 돋굴뿐이었다. 무언갈 듣고자 나를 부른게 아니었다. 이를 깨닫는데 삼개월이 걸렸다.

이사람은 나의 항변이나 사과를 듣고자 한게 아니라, 그저 나의 기를 죽이고 싶어했다는 것을 말이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부서장은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나의 포지션에 회의를 보인 이라고 한다. 부서장보다 더 높은 이와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결국 부서장의 뜻대로 안되고 이 포지션이 생기게 된거라고.

근데 하필 그게 부서장의 관할 아래 생겨났고 그 자리에 덜컥 내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누가 들어와도 그의 눈밖에 난 가시일 수 밖에 없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지난 1년 끊임없는 자기검열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를 내적으로 함께 무시(?)했기 때문에 거슬리는 정도였지 그로인해 큰 심리적 어려움에 빠지진않았다.

그랬으니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문제를 내재화하고, 남의 감정에 일희일비했다면 지옥같은 시간이었을 거다.

애초에 나때문에 생겨난 문제가 아니었는데, 나한테 있지도 않은 원인을 찾으려고 고군분투 하면서 말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여담인데 타격을 많이 안받았다고 해도, 왜 나한테만? 하는 피해의식이 생기긴했다. 대단한 선방이라고 생각한다.



회사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반드시 신경써야하는 곳이다. 상사에게 이런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어떤 행동을 해야 더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지 등 끊임없는 자기검열이 이루어진다. 그과정에서 고유의 내가 옅어지고 내면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여러 가면을 써야하는 직장생활을 할수록 더 면밀히 마음을 돌봐야하는 이유이다.


헌데 아무리 노력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은 분명 있을 수 있다.

내 고유의 모습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문제 때문일 수 도 있다.

어느쪽이든 내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나를 더 숨길것도, 나를 탓할 것도 없다.

어차피 내선에서 해결될 수 없을 바에야 나라도 지켜야 할테니 말이다.







요즘 비슷한 상황이 또 하나 있었다.

중국어를 배우기위해 약 7명으로 구성된 어학당 그룹 클래스를 수강하고 있다.

코로나로 대면수업이 어려워 적지 않은 수임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화상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선생님도 상황이 상황인만큼 최대한 학생들에게 발화기회를 줄 수 있도록 하고있다.


헌데 며칠 수업을 하다보니 선생님이 유독 나에게만 발화기회를 덜 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학생들이 5번 발화할 때 나는 기껏해야 3번하는 정도였다.

언어를 배우러 온 이들에게 발화는 참으로 중요한 영역이 아닐 수 없는데 왜 그만큼 신경써주지 않는지 기이했다. 그렇게 계속 관찰해보다가 발화 기회뿐 아니라 피드백도 다른 이들에 비해 현저히 얕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엔 내가 첫날 지각을 하고 받아쓰기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해서 감정이 생기셨나 했다. 아니면 한국인에 대한 안좋은 인식이 있으신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일본을 좋아하고 한국을 싫어하는 비교적 나이있는 대만인이 꽤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냥 모두 우연히 일어난 일일 수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약간 고민해보다가 이내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먼저 그저 어학당 강사와 수강생의 관계라는, 상식적인 선에서 검토해보아도 마땅한 원인을 알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애인, 친한 친구가 아닌 이상 더 깊이 들어가 능동적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는 건 주제넘는 일이다.

둘째로, 여차저차 원인을 알게됐다해도 내 성향에 대한 그사람의 주관적인 비호이거나 나와는 전혀상관없는 구조적 문제가 매개되있을 확률이 높다. 둘다 내 잘못이 아니다.



정말  사람이 그러한 이유로 나를 싫어하는게 맞다면, 그리고 이정도 고려했는데도 무슨 문제인지 모를정도라면

그사람의 일이다.

하여 그가 해결하도록 남겨두고 더이상 일희일비 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중국어 언어교환이나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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