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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루 Sep 02. 2021

대만에서 코로나를 겪어보니 한국이 다르게 보인다

대만 코로나 방역을 보고 느낀점


'길어지는 거리두기, 자영업자들 열명중 네명 폐업고려'

'연장.. 연장.. 피로도만 쌓여, 시민들 '거리두기 한계' 호소'




오늘 아침 눈에 띈 기사 헤드라인이다.

한국에 나와산지 6개월차에 접어들었지만 한국에서 대충 어떤 크고작은 일이 있는지 알고있는 편이다.

가족과 친구들을 통해 듣거나 이렇게 간간히 기사로 한국을 접한다.

매 소식에 접할 때 마다 여전히 잘 있구나 혹은 여전하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그중 가장 이목을 끌었던 것 중 하나는 단연 한국의 코로나 상황이다.

하루 확진자 수 천명대를 돌파하더니 내려올 기세를 보이지 않다가 결국에는 이천명대까지 돌파해버렸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어떠했나 돌이켜보면 터질게 이제야 터진건가 하는 생각도 조금이지만 든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 나의 생활은, 그리고 주변 대부분 사람들의 생활은 대만에서는 상상도 못할 양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이 방역 강국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이 행하고 있는 방역 지침들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에서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진심을 다하는 방역이라고 여겼다.

상황을 빠른시일내에 통제하에 둘 수 있었고 시민들 또한 높은 의식으로 그에 따라주었다.

어쩌면 그러했기에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탓에 문을 꽁꽁 걸어잠굴 수 없는 나라치고, 인구대비 확진자 수가 (이웃 비슷한 처지의 나라보다 훨씬) 적은 나라에 속했다.

허나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이곳 대만의 코로나 상황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생각이 갑자기 바뀐건 아니다.

대만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전국적으로 코로나가 갑자기 빵하고 터졌다.

코로나가 전세계적으로 시작된 이래로 1년 반 동안 대부분 하루 확진자 0에 수렴, 많아봤자 한자릿대를 유지하던 이 나라에 갑자기 예상치못한 빈틈이 생겼다.

자가격리가 면제되는 파일럿으로부터 감염이 노출되었고 긴장이 풀려있던 시민들의 태도와 맞물리며 무서울정도로 바이러스가 빠르게 퍼졌다.

첫 방역 빈틈이 발견되고 2주가 채 되지 않은 시점에 확진자는 전국각지에서 100명을 돌파했고 머지않아 500명까지 닿게 된다.

대만이 한국인구의 절반(약3천만명)을 조금 넘는 것을 생각하면 첫 감염이 시작된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아 1000명대를 기록한 것과 다름없다.




한국이 전국적인 확산양상을 보이며 1000명대를 처음 돌파한게 작년 12월, 즉 코로나 발발 후 약 일년이 지난 시점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누가봐도 한국보다 심각한 방역의 빈틈을 보이는 듯 했다.

그동안 대만이 코로나 청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저 문을 꽁꽁 걸어잠구는게 용이한 그 나라의 특수한 위치덕이었지

결코 방역시스템이 특히나 뛰어났기 때문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닿았다.

그만큼 한국은 잘하고 있었구나하는 생각도 강해졌고 말이다.







코로나 전이가 시작되자마자 대만은 대만의 스타일대로 모든 조치를 시작한다.

헌데 그 조치는 한국의 그것과는 정도와 밀도, 그리고 단행력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우선 늘 그래왔듯, 나라 문부터 걸어잠궜다.

전세계적으로 코로나 전파가 작년 초에 시작되자마자 모든 문을 꽁꽁 걸어잠궜던 이곳은,

그로부터 6개월이 되지 않은 시점에 모든게 통제하에 있다고 생각되자 적법한 비자(워킹홀리데이 비자 포함)가 있는 한 외국인의 입국을 허락했다.

비자를 발급받는 것도 문제 없었고 말이다.

그러다 영국발 변이 바이러스가 전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작년 12월 말,

너무나도 느닷없이 단 삼일만에 모든 문을 걸어잠가버린다.

당국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까봐'하는 우려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바로 다음달 출국예정이었던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눈물의 삼개월을 버티다보니 상황이 진전되었다고 생각되었는지, 대만은 이듬해 3월에 다시 국경을 살포시 열었다.

이때만을 기다렸던 나는 풀악셀을 밟아 안전히 대만에 골인하게 되었고 말이다.



그러다 머지않아 5월, 이번엔 대만내 사태가 심각해져버렸고

5월중순, 적법한 비자 대부분을 포함해 모든 외국인의 입국을 그 어느때보다도 강력하게 막아버렸다.

삼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은 꽁꽁 걸어잠겨져 있다.

그 찰나의 빈틈에 들어오게 되어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님 들어와서 사실상 반락다운 상태로 집에만 칩거하며

한국에 있을때만도 못한 생활을 하게 되어 불행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대만이 취한 또다른 조치로는 밀도높은 거리두기가 있다.

자국 내 코로나 확산이 시작되자 마자 대만은 거리두기 3단계를 시행한다.

한국이 하루확진자 천명을 넘어가던 작년 12월, 즉 한해를 코로나로 시름시름 앓아도 결국 시행하지 않았던 바로 그 3단계를 바로 때려버린것이다.

식당과 카페 모든 식당내 취식이 금지되었고 학교는 모두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었다.

직장도 웬만하면 대부분 재택근무로 전환되었다.

대부분의 관공서, 공원, 하물며 동네 뒷산도 모두 막혀버렸다.

그야말로 갈곳이 편의점 밖에 없었다. 거리에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고 누군가를 밖에서 만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 되었다.

밖에서 밥을 먹을 수 없으니 밥시간대를 피해 외출을 해야했고

그렇게 외출시간도 자연스럽게 3시간을 넘지 못했다.







당시 나로서는 대만의 이러한 박력이 있다 못해 넘쳐흐르는 대처에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대만보다 훨씬 오랫동안, 꽤 심각한 상황을 여러번 겪어온 나라에서 온 사람으로서 이 모든게 과도한 조치같았다.

아니 식당을 다 막으면 어떡해? 야외시설이라도 열어줘야 마스크끼고 산책이라도 하지 않나? 이렇게 싹다 막는다고 해결이 되나?




한국에서도 한창 코로나가 초반 기승을 부리던 시절, 전국민을 2주간 격리시키고 물리적 행동을 멈추면 사실상 국내 코로나가 종식되는 것 아니냐는 가설을 들은적이 있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 외부에서 유입되는 코로나가 없는 경우라면 말이다.

어쩌면 대만인들이 지금 그걸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밥먹지 말고, 마스크 절대 벗지 말고, 웬만하면 집에 있어라.'



이 3계명만 기억하라는 의사출신의 타이베이(수도)시장의 말은 국내 코로나 종식을 시도해 보자는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

허나 실제로 2주이상 이런 정책을 유지하기란 쉬운일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나라만 봐도 이렇게는 자영업자가 남아나지 않을것이고 경제가 다 바닥날 것이라는 우려가 가득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코로나가 터진 작년 2월 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강도높은 거리두기를 진행한다 해도 식당 전체 영업을 다 막은 적은 한번도 없지 않던가.




이해가 어려워도 남의 나라 사정인건 매한가지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었고 덕분에 나도 어학연수하러 이곳에 와서 집에만 머물며 사이버강의를 듣게 되었다.

원망스러웠지만 원망의 대상이 모호해 답답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데 집중했다.







한동안 확진자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이게 되면 벌써 많은 나라는 극복을 했겠다 싶었다.

심지어 확진자 수 측정체계도 엉망인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지난주의 정확한 확진자 수를 알려주는 교정회귀 발표가 빈번했다.

이 나라가 작년 한해 청정할 수 있었던 건 탁월한 방역 시스템 떄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그저 문을 빨리 걸어잠글 수 있었던 국제정세 속 형세 덕분 아니었을까,

그리고 만에 하나라는 빈틈으로 바이러스가 들어오지 않았던 엄청난 행운이 함께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키트가 모자라 쏟아지는 pcr 검사수를 감당하지도 못하고

병상수와 백신 수급조차 하나도 대비되어있지 않은 형국을 보며

외국인이지만 그 일년의 패러다이스 시간동안 이 나라는 무얼했나 혀를 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고 거리두기는 또 2주 연장되었다.

역시나 밖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테이크아웃을 제외하면 식당도, 카페도, 학교도 못갔다.

슬슬 이 나라 사람들이 완벽주의를 내려두고, 코로나와 함께 하는 삶을 인정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극단적인 거리두기가 계속 되어도 완벽하게 예전으로 돌아가긴 힘들어보이고,

설령 가더라도 거리두기를 풀면 다시 시작되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지역 소상공인 경제가 아작나는건 두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렇게 회의만 가득했지 남의 나라라 어디다 말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또 다른 한달을 존버했다.







정말 놀랍게도 7월 말에 접어들며 하루 확진자 수가 20명대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서는 하루 한자리대도 가끔 목격했다.


이게 두달만에 된다고?


정말 놀랐다. 두달만에 오백명에서 한자릿수라니.

대만이 정말 투명하게 하고있는건가 의심이 들면서도, 이제 곧 오프라인 생활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루는 너무 답답해서 자전거를 타고 동네에 있는 공터를 돌다가 영상을 찍어 sns에 올렸다.

너무나도 예상치 못하게 대만 친구로부터 '본인은 한달 째 밖을 못나가고 있다'는 뼈있는 답신을 받고 바로 포스팅을 내렸다.

한국의 코로나가 처음 시작 되던 때도, sns에 이곳 저곳 다니는걸 전시하는 건 눈치가 없는 행동이었다는게 불현듯 떠올랐다.

그들에게는 지금이 처음이니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겠다 싶었다.

내 생각이 짧았다고 반성하면서 동시에 공터에서 혼자 노는건데 이렇게까지 눈치를 줄것있나? 하는 마음이 공존했다.




또 하루는 어학당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

조만간 식당내 취식이 가능해지고 학교도 오프라인 수업으로 전환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아직 안전하지 안다고 느껴서 우리반은 계속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하면 어떻겠냐.



목빠져라 오프라인 수업만을 기다리고 있는 내게 선생님의 말은 정말이지 유난이라고 느껴졌다.

식당 내 취식이 가능해지고 학교도 오프라인 수업을 시작하게 되면 당연히 확진자는 다시 많아질 터.

그리고 다시 지역 감염은 시작 될 터.

예전의 파라다이스로 돌아가는 건 어려울 터인데 대체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코로나와 공존하는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낙오된 시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8월이 되고, 온라인 수업은 계속 되었지만 참으로 감사하게도 식당 내 취식이 가능하다는 정부의 지침이 내려왔다.

여기서 또 다른 놀라움을 경험한다.






나야 하루 천명대가 나오던 시절 서울에서 회사 출퇴근하며, 필요시 식당에서 식사도 하면서 살았기에

언제나 조심하며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는 삶이 낯설지 않았다.


허나 대만인들에게는 아니었나보다.

아직도 그들은 밖으로 나갈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식당 내 취식을 계속해서 금지하라는 여론을 형성하고 집단 항의를 하는가 하면

식당들도 자발적으로 식당 내 취식과 카페나 취식을 금지했다.

문을 열지 않은 집들도 더러는 보였다.

밖에 나갈때는 안구보호대를 착용했고, 마트에 갈땐 위생장갑을, 마트라도 갈라치면 얼굴 전체를 가리는 페이스쉴드를 착용했다.


다시 예전의 생활을 재개하려는 주체는 정부와 나같은 외국인 밖에는 없어보였다.

모든 시민이 진심으로 대만의 안위를 생각하는 것처럼, 혹은 본인들의 목숨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 처럼 보였다.

그렇게 밖에는 해석이 안됐다.




처음 식당이 문을 연날, 이날을 기념해야한다며 훠궈집에 갔더랬다.

두달만의 훠궈라니, 사람이 가득 미어찰거라 예상하며 (사실 한국이었으면 그랬을거라 생각하며) 대기할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 갔더니

이게 웬걸, 손님은 나와 내 일행 그리고 저기 멀리 앉아있는 몇 팀 뿐이었다.

그 큰집에 달랑 다섯손가락 안으로 셀 수 있는 손님과 그보다 많은 스텝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하물며 함께 간 일행과 같은 테이블에 앉지도 못해서 서로 등을 쳐다보며 혼밥을 하기에 이르렀다.



칸막이와 식당내 거리두기는 또 어찌나 꼼꼼한지, 들어가는 모든곳마다 큐알체크와 손소독은 반드시, 하나도 빠짐없이 검사하고

식당 내 이동을 막기 위해 모든 식기와 소스류는 개별 포장되어 제공되었다.

이런 탁월하고 꼼꼼한, 그리고 진심인 방역 시스템은 한국에서 조차 경험해보지 못했다.

이곳은 조금 늦었을 뿐, 모든 방역을 높은 수준으로 다시 끌여올려 낸 것이다.






식당 내 취식이 가능해져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해진지 이제 한달이 다되어 간다.

이제는 학교도 오프라인 수업을 시작해서 당장 내일 첫 학기 부터는 학교에 등교해 수업을 듣는다.

헌데도 요 몇일 연속, 대만의 하루 확진자 수는 0명이다

식당 취식을 허용하고 학교등교를 하고 직장 출근을 재개하면 다시 확진자가 많던 때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요즘 대만의 모든 코로나 상황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준다.

이게 돼? 했던게 진짜 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그들의 방역이 처음에는 어수선 했을 수 있다.

일년 가까이 청정했기에 마스크를 잘 끼고 다니지 않았던 탓에 갑작스러운 구멍에 혼비백산이 되었다.

확진 추적 체제도 처음엔 제대로 가동하지 않았지만 이내 빠르게 정비했고, 모든 조치를 취했으며 , 시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움직였다.

그러면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우리나라는 안되는게 이곳은 된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한국이 강도높은 거리두기 4단계를 시작한지 한달이 되어간다.

모든 식당과 카페 취식의 금지, 전면 오프라인 근무와 수업을 경험한 이곳에서 지금의 한국을 바라볼 때의 시선에 조금의 변화가 생겼다.


이천명이 넘는데 아직도 식당영업을 한다고? 아직도 학교에 가고 출근하는 회사가 있다고?

아예 막은 것도 아니고, 저녁 시간 제한을 둔 것 뿐인데 거리두기에 지쳐 민심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고?

(물론 대만의 자영업자들은 어떻게 생존하는지, 정책에 불만을 갖는 이들도 분명있을텐데 왜 한국만큼이나 수면에 드러나지 않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결코 한국에만 있었으면 생각하지 못했을 시선들이다.







나라마다 모두 사정은 다르다.

그러니 어디의 방법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기준이 어디있느냐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뿐이다.



내 기준이 바뀌게 된 계기는 안되는 줄로만 알던게 되는 걸 목격한데 있다.

아직은 운이 좋아 성공한 상황만 봤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게 가능한 특수한 환경의 사례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시기를 늦추는 것일 뿐 결국 특정한 결론으로 도달하는 과정에 있는 것일 수 도 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두눈으로 목격한 이곳에서의 '비상식'이 '상식'이 되는 경험은 참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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