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 있다. 붉은 벽이다. 벽돌의 낱장이 수평과 수직으로 단단하게 쌓여 있다. 규칙은 견고하다. 벽은 배경이다. 어떤 행위도 허락하지 않고, 그저 서 있다. 오래된 유화처럼 붉은 색채가 깊다.
햇빛이 들어온다. 빛은 벽을 가른다. 거대한 사선이 벽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림자가 생긴다. 그림자는 빛의 부재이다. 비물질의 검은 덩어리가 벽의 붉은 물질을 침범한다.
이 찰나에 그림자는 벽보다 더 단단하고 명확한 존재가 된다. 벽의 수직선과 그림자의 사선이 충돌한다. 정지된 배경에 동적인 힘이 실린다.
한 인간이 지나간다. 검은 옷을 입은, 짧은 그림자를 가진 인간이다. 거대한 벽과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 인간은 점이 된다.
인간의 걸음은 배경을 방해하지 않는다. 인간의 움직임은 이 구도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 찰나의 순간, 인간은 이 정지된 무대의 유일한 동선이 된다.
벽은 묻는다. 너의 일상은 작품이 될 수 있느냐고.
너는 매일 반복되는 벽돌의 패턴처럼 지루하게 살고 있느냐고. 아니면 빛이 만들어낸 예측 불가능한 사선처럼, 스스로의 찰나를 작품으로 만들고 있느냐고.
작품은 캔버스 위에 고정된 것이 아니다. 작품은 빛과 그림자, 그리고 그 속을 지나가는 인간의 우연한 위치이다.
일상의 반복 속에서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눈. 그 눈이 예술이다.
나는 그 찰나를 본다. 붉은 벽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내가 멈추자, 그 순간이 영원히 고정된 작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