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은퇴 후, 나는 느려졌다.
바쁘게 살아온 시간들이 뒤로 물러나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담쟁이가 자라는 벽의 틈, 옹벽에서 빗물이 새어 나오는 틈, 돌과 돌 사이의 틈. 나는 그 틈들을 들여다보았다.
틈은 불완전함의 증거이다. 완벽하게 밀봉하려 했으나 시간과 습기가 결국 찾아낸 빈 곳이다. 그러나 그 틈에서 생명이 자란다. 담쟁이는 틈을 뿌리내릴 곳으로 선택했고, 빗물은 틈을 통해 예상치 못한 추상화를 그렸다. 돌탑의 돌들은 틈 사이로 서로를 지지하며 무너지지 않는 균형을 이룬다.
나는 일상 속 사물들을 보았다. 우편함, 그늘막, 계단 손잡이, 벤치, 가로등. 그것들은 늘 거기 있었다. 다만 나의 시선이 닿지 않았을 뿐이다. 바쁠 때 나는 그것들을 기능으로만 보았다. 우편함은 편지를 받는 곳, 벤치는 잠시 앉는 곳. 그러나 느려진 후 나는 그것들의 침묵을 들었다. 우편함의 비어 있음, 벤치의 기다림, 가로등의 밤샘 노동.
신문을 읽다가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에 붙은 작은 표지판, 녹슨 철문에 칠해진 'ㅋㅋㅋ', 낡은 담벼락에 새겨진 '사이좋게 지내요'. 익명의 누군가가 남긴 말들이었다. 그 말들은 거창하지 않았다. 다만 다정했다. 나는 그 다정함에 위로받았다.
59세, 혼자 사는 나는 자주 고독하다. 관계는 멀어졌고, 삶의 경계는 단단해졌다. 그러나 일상의 틈을 들여다보며 나는 깨달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담쟁이가 틈에서 자라듯, 나도 작은 틈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루터기가 죽은 후에도 이끼의 토대가 되듯, 나의 멈춤도 누군가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느린 시선의 기록이다. 일상 속 사물들이 건네는 침묵의 언어, 그 언어를 듣고 기록했다. 19편의 에세이는 다섯 개의 틈으로 나뉜다.
Part 1. 생명의 언어에서는 공생하고, 기대고, 자라고, 순환하는 생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Part 2. 사물의 철학에서는 걸쇠, 그늘막, 손잡이, 벤치, 옹벽, 기와가 건네는 쓸모와 쉼, 지지와 기다림, 불완전함과 질서의 철학을 담았다.
Part 3. 침묵의 대화에서는 우편함, 엘리베이터, 가로등이 말없이 건네는 배려와 노동의 이야기를 담았다.
Part 4. 익명의 언어에서는 이름 없는 누군가가 남긴 웃음과 요청, 환대의 흔적을 담았다.
Part 5. 시간의 무게에서는 황금색 로봇, 붉은 벽, 해안도로가 보여주는 시간의 흐름과 굴곡, 일상이 예술이 되는 순간을 담았다.
바쁜 삶을 살아온 당신도 이제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길 바란다. 거기, 당신이 놓친 틈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 틈 사이로 생명이 자라고, 빛이 새어 들고, 누군가의 다정한 말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비어 있어도 괜찮다. 느리게 가도 괜찮다. 틈이 있기에 우리는 숨 쉬고, 자라고, 서로를 지탱할 수 있다.
이 글이 당신의 일상에서 작은 틈 하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025년 11월
진주의 작은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