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침묵

『물질의 세계』를 읽고

by 건강한 오후


1부. 아파트의 모래, 침묵의 비명


은퇴 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아침이면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습관처럼 창밖을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어느 날, 무심코 등을 기댄 벽을 만졌다. 손끝에 닿은 냉기가 유난히 오래 남았다. 이 벽은 하루 종일 나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차가운 콘크리트. 이 벽은 대체 어떤 이야기로 만들어졌을까?


에드 콘웨이의 『물질의 세계』는 그 질문에 대한 충격적인 답을 들려주었다. 콘크리트의 주성분인 모래. 저자는 우리가 흔하게 여기는 이 모래가 세상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고체 원자재이며, 고갈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 이 도시 문명 전체의 뼈대를 이루는 모래가, 사실은 가장 불안하고 폭력적인 토대 위에 세워져 있었다.


책 속에는 모래를 둘러싼 은밀한 전쟁이 펼쳐진다. 국토 확장을 위해 이웃 나라의 섬을 통째로 사들이는 싱가포르, 강바닥을 파헤쳐 생태계를 파괴하고 살인도 서슴지 않는 인도의 모래 마피아. 그들이 파낸 강이 내가 사는 도시의 빌딩으로 둔갑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벽을 다시 만졌다. 이 침묵하는 콘크리트 속에 누군가의 강이 사라진 이야기, 누군가의 삶터가 파괴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내가 누리는 안온한 일상이 폭력적인 갈등 위에 서 있다는 사실. 그 무지에 대한 서늘한 각성이 밀려왔다.


2부. 보이지 않는 여섯 개의 기둥


콘웨이는 이처럼 우리가 존재를 망각한 채 살아가는 여섯 가지 핵심 물질을 추적한다. 모래, 소금, 철, 구리, 석유, 리튬. 이 여섯 가지 없이는 현대 문명 자체가 멈춘다. 책을 읽다 말고, 내 책상 위를 둘러보며 이 보이지 않는 물질들의 연결망을 그려보았다.


손에 든 커피잔(모래 기반의 점토), 노트북(모래에서 추출한 실리콘 칩), 책상다리(철), 스마트폰 충전기 속 전선(구리). 이 모든 사물은 석유로 돌아가는 공장에서 만들어졌고, 미래의 전기차 배터리에는 리튬이 필수적이다.


지난 25년간 나는 회의실에서 실적표와 숫자만 보며 살았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명확한 수치에만 몰두했을 뿐, 그 숫자를 만들어낸 공장, 그 공장을 돌리는 전기, 그 전기를 흐르게 하는 구리를 캐낸 노동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야 보인다. 내가 그토록 의지했던 숫자의 세계는,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들의 거대한 토대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위태로운 성채였음을.


3부. 사물에 새겨진 권력


물질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았다. 『물질의 세계』는 자원의 흐름이 곧 권력의 흐름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미 칠레의 경제는 구리 가격에 따라 휘청이고, 미래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리튬을 가진 볼리비아에서는 추출 과정 때문에 원주민 공동체가 마실 물이 고갈된다. 중국은 희토류 수출을 무기 삼아 세계를 위협한다. 이것은 더 이상 먼 나라의 뉴스 기사가 아니었다. 내가 매일 쓰는 스마트폰, 내가 꿈꾸는 친환경 전기차로의 전환, 그 모든 것이 새로운 자원 전쟁의 서막일 뿐이었다.


지난 25년간 나는 이 권력 구조의 꼭대기에서 안락하게 일했다. 아니, 애써 외면했다. 당장 이번 분기 실적을 달성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 뒤에서 구리 광산이 파괴되든 모래 마피아가 강을 파헤치든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문제'였다. 어쩌면 그 무관심 덕분에 지금의 편리함과 안정적인 노후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사용한 모든 것에는 보이지 않는 대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침묵하는 사물들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과 파괴된 자연의 신음이 숨어 있었다.


4부. 커피잔에 담긴 세계, 나의 책임


책을 덮고, 식어버린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이 잔 하나에 담긴 세계를 상상해 본다. 잔을 빚은 점토는 중국이나 한국의 어느 산에서 채굴되었을 것이다. 도자기를 구운 가마는 석유나 천연가스로 뜨거워졌을 것이고, 안에 담겼던 커피 원두는 콜롬비아나 에티오피아에서 석유를 연료로 쓰는 거대한 컨테이너선에 실려왔을 것이다. 하나의 커피잔에 지구 전체의 복잡한 연결망과 그림자가 담겨 있었다.


이제 나는 이 잔을 그냥 내려놓을 수 없다. 모든 소비는 정치적 행위이고, 모든 사물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침묵하던 사물들이 이제야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외면할 것인가?"


세계를 당장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커피잔을 내려놓는 나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 조금 덜 소비하고, 조금 더 오래 사용하며, 이것이 어디서 왔는지 한 번 더 질문하는 것. 그것이 25년간 무지 위에 서 있던, 별의 재로 만들어진 한 인간이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다.


138억 년 전, 별은 우리 몸을 이룰 원소를 만들었다. 7만 년 전, 사피엔스는 지구를 지배할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나의 책상 앞에서 책임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