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의 선택 앞에서
은퇴 후, 내 안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남은 삶의 가치'를 고민하던 내게, 스무 살에 '삶을 포기할 가치'를 논했던 한 청년의 선택은 외면할 수 없는 질문으로 다가왔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속 에이드리언 핀. 그는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자살을 선택하며 검시관에게 이런 유서를 남겼다.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의 삶의 본질을 검토할 철학적 의무가 있으며, 그 후 그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
이 문장 앞에서 나는 오래 멈춰 섰다. 직장의 시간은 목표를 향해 직선으로 질주했고, 모든 것은 계산 가능해야 했다. 하지만 은퇴 후의 시간은 느리고 순환적이다. 과연 스무 살 청년이 내린 이 결론, 죽은에 대한 '예감'은 옳았는가? 철학자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펼쳐 들고, 나는 에이드리언의 선택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케이건은 자살이 합리적 선택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는 종교적, 감정적 판단을 걷어내고 순수하게 논리로만 접근한다. 자살이 합리적이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삶이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어야 하고, 합리적 판단 능력이 있어야 하며, 다른 모든 대안을 충분히 검토했어야 한다. 에이드리언은 정신적으로 온전했다. 그의 유서와 일기는 깊은 숙고의 흔적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체적 고통이 없었다. 있었던 것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실존적적 번민뿐이었다. 이것만으로 "삶이 살 가치가 없는 상태"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케이건은 지적한다. 자살을 고려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현재 상태의 영속화"라고. 에이드리언은 스무 살이었다. 그의 철학적 고뇌가 평생 지속될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나는 육십 년을 살아오며 깨달았다. 스무 살의 관점과 예순 살의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젊은 시절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며 의미를 얻거나, 혹은 그저 흘러가 버린다. 에이드리언에게도 그런 순환적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실존적 고뇌는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치료나 상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관점에서 보면 에이드리언의 선택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내린 성급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합리성만이 전부는 아니다. 케이건은 도덕성 또한 중요하게 다룬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특히 자살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평생의 상처를 남긴다. 작품 속에서 베로니카와 토니는 사십 년이 지나서도 고통받는다.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선택이 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충분히 고려했을까?
나는 은퇴 후 관계의 무게를 더 절실히 느낀다. 지난겨울, 오랜만에 연락이 끊긴 후배에게서 걸려온 짧은 안부 전화가 그날 하루를 버티게 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는 것. 그것이 나를 살게 만드는 힘이었다. 우리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살아간다. 내 선택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삶에 파문을 일으킨다. 묵묵히 바라만 보게 되는 낡은 사진 속 얼굴들, 차마 먼저 안부를 묻지 못하는 껄끄러운 관계들. 이런 것들이 쌓여 한 사람의 삶이 된다. 에이드리언은 너무 젊어서 이 관계의 무게와 책임을 몰랐을 것이다.
에이드리언의 가장 큰 오류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삶을 계산으로 접근했다'는 데 있다고 본다. 그의 유서는 삶의 가치를 수학 공식처럼 검토하려는 계산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삶은 계산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케이건은 생명 자체에 내재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좋은 경험들의 합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전화벨 소리의 예고 없는 진동. 창밖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손등에 닿는 가벼운 무게. 누군가가 끓여준 차 한 잔의 입술을 감도는 따뜻한 습기. 이런 소박한 순간들 속에 삶의 가치가 숨어 있다. 계산할 수 없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가치. 삶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에이드리언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많은 철학이 아니라, 덜 철학적인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케이건이 에이드리언에게 했을 조언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당신의 고뇌는 진실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영원하다고 단정하지 마세요. 시간을 더 두세요. 전문적 도움을 받으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의 눈에 비친 당신의 가치를 느껴보세요."
에이드리언의 자살은 합리적이지도, 도덕적으로 정당하지도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를 비난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는 아니다. 우리의 책임은 더 이상 에이드리언 같은 청년이 혼자 고뇌하다 무너지지 않도록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내 안의 고인 물을 글로 퍼내어 새로운 물길을 내는 행위를 통해, 계산할 수 없는 삶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쓴다. 이 물길이 흘러 또 다른 에이드리언의 고인 마음에 닿을 때, 그것이 먼저 살아남은 자로서 그에게 내밀 수 있는 나의 가장 조용한 손 내밈이 될 것이다.
삶의 가치는 계산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물길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깊고 단단하게 존재하는지 증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