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올의 이진수

by 건강한 오후

진주실크박물관 1층 전시실이다. 냉기가 돈다. 천장에서 내려온 실크 조형물이 허공에서 물결친다. 바람은 없으나 천은 움직인다. 미세한 기류에도 반응하는 것이다.


체험용 실크를 만진다. 미끄럽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쥘 수 없는 감촉이다. 25년간 악수로 쥐었던 명함들의 뻣뻣한 질감과는 정반대다. 명함은 쥐는 순간 구겨졌다. 이 실크는 아무리 쥐어도 주름이 남지 않는다. 흔적을 허락하지 않는다.


퇴직하던 날. 책상 서랍에서 나온 명함 한 장. '대리 이진수'. 25년 동안 명함은 네 번 바뀌었다. 대리, 과장, 부장, 상무. 종이의 재질은 고급스러워졌고 직함은 무거워졌다. 그러나 이진수는 바뀌지 않았다.


유리관 속 누에고치. 설명문이 붙어 있다. "누에는 자신을 가두고 나비가 된다." 나는 25년 동안 회사라는 고치를 지었다. 나비는 날아갔고, 빈 고치만 남았다.


다음 전시실. 붉은 혼례복이 걸려 있다. 금박이 빛난다. 봉황과 모란이 얽혀 있다. 붉고, 화려하고, 무겁다. 25년 동안 회사가 나의 혼례복이었다. 그 옷을 입고 정해진 자리에 서서, 정해진 말을 했다.


건너편 벽의 수의. 흰색이다. 장식은 소멸했다. 직조는 혼례복보다 촘촘하다. 삶의 마지막 옷은 가볍다.


퇴직하던 날, 김 부장이 내 방에 들어왔다. "상무님, 수고하셨습니다." 25년을 함께 일했는데 마지막 말은 의례적이었다. 나도 "고생했네"라고 답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직함이 주어이고 인간은 서술어였다.


전시장을 나선다. 조형물을 다시 본다. 각도를 바꾸니 빛깔이 다르다. 실크는 고정된 색이 없다. 빛이 색을 만든다.


주차장으로 걷는다. 휴대폰을 꺼낸다. 전화번호부의 '김 부장'을 찾는다. '김철수'로 고친다. 저장 버튼을 누른다. 낯설다. 나는 김 부장은 알지만 김철수는 모른다.


문자를 쓴다. "오랜만이야. 국밥 한 그릇 할까?" 커서가 깜빡인다. 발송 버튼 위에서 엄지가 머뭇거린다. 누른다.


답장이 온다. "상무님, 좋습니다. 언제 편하신지 말씀해주십시오."


여전히 '상무님'이다. 5년이 지났으나, 그와 나 사이에는 아직 직함이라는 벽이 서 있다. 실크처럼 부드럽게 섞이지 못한다. 벽은 내가 쌓았고, 그가 지킨다.


차에 시동을 건다. 백미러에 박물관이 비친다. 회색 건물이 오후 햇살을 받아 번쩍인다. 이제 내가 짜야 할 직조는 무엇인가. 보고서가 아닌 문장. 승인받지 않아도 되는 문장. 그것이 비단일지 무명일지는 알 수 없다.


백미러 속에서 박물관이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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