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는 붙들지 않는다

by 건강한 오후

아침 산행길, 이끼에 뒤덮인 거대한 그루터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베어진 지 꽤 오래되어 보인다. 몇십 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단면 위로 초록 이끼가 두텁게 자라났고, 옹이 속에는 낙엽이 쌓여 부식토가 되어 있다. 한때 하늘을 향해 치솟았을 나무는 이제 땅에 완전히 굴복한 채, 제 몸을 허물며 타자의 터전이 되고 있다. 나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무는 이미 오래전에 자라기를 멈췄다. 물관을 타고 중력과 사투를 벌이던 엽록소의 행군도, 바람에 몸을 흔들던 가지의 저항도 끝났다. 이제 나무는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주저앉으며 흙으로 돌아가고 있다. 수직의 야망이 잘려 나간 자리는 이미 세월에 부식되어, 나무였던 물질과 흙이 될 물질의 경계가 흐릿하다.


사흘째 되던 날, 나는 그루터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관절이 뻐근했다. 스물다섯 해를 기업의 책상 앞에 앉아 보고서를 검토해왔다. 무릎은 쪼그려 앉는 자세를 몇 분도 허락하지 않았다. 다리가 저려 올 때쯤, 비로소 이끼의 결이 보였다. 나무의 죽은 단면을 토대로 삼아 초록의 영토를 넓혀가는 이끼들. 손가락을 대보았다. 축축했다. 며칠 전 내린 비를 이 놈들은 아직도 쥐고 있었다. 죽은 나무는 이제 습윤(濕潤)한 나라가 되어 있었다.


이끼 위에 바람이 실어온 솔잎들이 쌓이고, 그 틈에서 이름 모를 작은 풀들이 머리를 내민다. 높이는 낮으나 생명의 밀도는 히말라야보다 짙다. 옹이 속에 고인 물은 하늘을 담는 작은 호수가 되었다. 거기엔 내 얼굴도 어렴풋이 비쳤다. 어제보다 조금 더 깊어진 주름이 물결에 흔들렸다. 고개를 들어 그루터기 위를 보았다. 개미 한 마리가 옹이 속 물을 마시고 있었다. 저 놈에게 이 나무는 우주였다. 나는 한참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문득 회의(懷疑)가 고개를 든다. 이 풍경을 '환대'나 '공생'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는 것은 나의 오만이 아닐까. 나무는 정말로 이 침식을 허락했을까. 어쩌면 무력하게 분해되어 가는 과정을 나는 은퇴라는 나의 처지에 빗대어 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루터기 옆에 누군가 버리고 간 찌그러진 캔커피가 보였다. 담배꽁초 하나가 이끼 사이에서 시큼한 악취를 풍겼다.


나는 그것을 줍지 않았다.


생명은 선택적이며, 자연은 나의 위안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려다 다시 주저앉았다. 내가 여기서 본 것은 정말 '환대'였나, 아니면 내가 보고 싶었던 환대의 환영(幻影)이었나. 사흘 동안 이 자리에 앉아 무엇을 얻으려 했던 것일까. 위로? 정당화? 그루터기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썩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한참을 그 침묵 앞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바람이 불었다. 그루터기 위의 이끼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떨림을 보는 동안, 이상하게도 확신이 들었다. 그루터기의 부패는 정직했다. 썩고, 닳고, 허물어지는 과정 전체를 드러내며 그것으로 타자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은퇴 후, 나는 내가 폐허가 되었다고 믿었다.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보잘것없는 육신의 쇠락뿐이라고 생각했다. 회사 동료들과의 연락도 끊겼다. 한 달에 한 번쯤 만나는 벗들도 하나둘 줄어든다. 나는 그것을 억지로 붙들지 않는다. 그루터기가 떨어져 나간 가지를 붙들지 않듯이.


나를 증명하기 위한 화려한 잎새는 떨어졌다. 그러나 내 삶의 단면은 이제 빈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시간, 책장을 넘기는 시간, 문장 하나를 고치는 시간. 그 시간들이 쌓여 이끼가 되고, 옹이가 된다. 그루터기는 그렇게 자신의 소멸을 노동으로 바꾸고 있었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서 뚝 하는 소리가 났다. 다시 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루터기는 여기 남고,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루터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저녁 바람에 솔잎 한 장이 떨어져, 내 주름진 손등 위를 스치고 이끼 속으로 숨어들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