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페달을 밟다 보면 도시의 숨겨진 살결들이 보인다. 큰길에서는 보이지 않던 낡은 골목의 담벼락들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서 있다. 어떤 벽은 위협적인 철조망을 두르고 있고, 어떤 벽은 깨진 병 조각을 박아 침입을 경계한다. 벽의 본질은 단절이다. 이쪽과 저쪽을 나누고, 나의 영토를 보존하며, 타자의 시선을 차단하는 가장 물리적인 거부다.
그날 본 담벼락은 유독 낡아 있었다. 페인트는 허물처럼 벗겨져 시멘트의 거친 속살이 드러났고, 세로로 길게 간 금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비명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남루한 표면 위에 세로로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새긴 글씨가 있었다.
'사이좋게 지내요'
순간 페달을 밟던 발이 멈췄다. 벽의 기능과 문장의 목적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워진 벽이, 오히려 타자에게 다정함을 요청하고 있었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이 낡은 시멘트 위에 이런 말을 남겼을까. 세로쓰기의 단정한 필획 하나하나에는 익명의 손이 오래 머물렀던 시간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표어나 구호라기보다는, 차마 전하지 못한 고백이나 간절한 기도처럼 느껴졌다.
스물다섯 해 동안 나는 기업이라는 거대한 벽 안에서 살았다. 그 안에서의 관계는 '사이좋음'보다는 '이해관계'에 가까웠다. 직함이라는 견고한 벽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서로를 탐색했고, 결재 서류의 행간을 통해 칼날 같은 의중을 주고받았다. 은퇴 후, 그 벽들이 사라지면 해방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다시 자발적인 벽을 세웠다. 독신이라는 편안한 고립, 은퇴자라는 익명의 그늘 아래 숨어 타인과의 거리를 정밀하게 유지해왔다.
담벼락에 적힌 글씨를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페인트가 가루가 되어 묻어났다. 완벽하게 매끄러운 벽이었다면 저 문구는 공허한 도덕 교과서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비바람에 깎이고 균열이 간 낡은 벽이었기에, '사이좋게'라는 말이 주는 울림은 서늘하고도 따뜻했다. 그것은 상처 입은 존재가 다른 상처 입은 존재에게 건네는 손길 같았다. 완벽하지 못한 것들끼리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풍경.
문득 자문했다. 나의 벽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가. 홀로 자전거를 타고, 책을 읽고, 문장을 다듬으며 세운 나의 경계는 타인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있는가. 나는 혹시 '침범하지 마시오'라는 푯말만 붙여둔 채 늙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사이좋음이란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는 맹목적인 통합이 아니다. 담벼락처럼 각자의 영역을 분명히 인정하되, 그 경계 위로 따스한 안부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여유다. 내 무릎의 통증을 알듯 타인의 휘어진 등허리를 짐작하고, 내 고독의 무게만큼 타인의 적막을 존중하는 것. 벽은 서 있되, 그 위로 마음이 오갈 수 있는 틈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은퇴 5년 차인 내가 배워야 할 새로운 '사이(間)'의 기술이다.
해 질 녘, 골목을 빠져나오며 다시 한번 그 문장을 읽어본다. 담벼락은 여전히 침묵하며 서 있지만, 그 위로 흐르는 붉은 노을이 글자들을 가만히 보듬고 있었다. 자전거를 돌려 집으로 향하는 길, 가슴 한쪽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 틈 사이로 오랜만에 벗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가 각자의 벽 앞에서 여전히 잘 버티고 있는지, 그저 묻고 싶어졌다. 억지로 가까워지려 애쓰지 않아도, 남은 생은 조금 더 사이좋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담벼락 위 세로로 새긴 그 문장처럼, 정성스럽고 또박또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