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인간, 문명의 그림자
여름의 열기가 무겁게 내려앉던 어느 날, 나는 골목 어귀에서 삶은 고기와 땀이 뒤섞인 눅진한 냄새를 맡곤 했다. 허름한 간판, 닳아 해진 의자, 천장 선풍기 아래로 떨어지던 땀방울까지도 음식의 일부가 되어버리던 시절. 그것은 보신탕집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간판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국회는 법으로 개 도살을 금지했고, 주인들은 다른 생계를 찾아 흩어졌다. 냄새와 풍경은 그렇게 종말을 맞았다. 종말은 언제나 그렇듯, 조용하고도 단호하다.
그러나 종말은 곧 새로운 시작의 이름이기도 하다. 성남 모란시장의 입구에 들어서면, 예전과는 다른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흑염소 특화거리.' 개 대신 염소가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다. 나는 그 풍경 앞에서 깨닫는다. 인간의 식탁은 결코 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나의 울음이 잦아들면, 곧 다른 울음이 그 자리를 메운다. 우리는 그것을 새로운 음식이라 부르고, 새로운 전통이라 기억한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호모 카르니보루스, 먹는 인간. 생각하기보다 먼저 먹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타자의 죽음을 전제로 삼는 존재.
나는 인간의 아이러니를 본다. 개는 이제 친구가 되었지만, 염소는 여전히 밥상 위의 희생물이다. 소와 돼지는 공장식 축사에 갇히고, 닭은 햇빛 한 번 보지 못한 채 생을 마친다. 우리는 반려견의 눈빛에서 '교감'을 읽지만, 동시에 삼겹살에 환호하고 치킨 배달을 기다린다. 인간의 윤리는 언제나 스스로의 이율배반을 조율하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개를 먹지 않게 된 것은 진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염소와 돼지, 닭의 희생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진보일 뿐이다.
나는 기억한다. 어린 시절, 마당 한쪽에 묶여 있던 강아지를 바라보던 순간. 그 눈빛은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 맑았으나, 나는 그 속에서 번역할 수 없는 언어를 보았다. 울음이 남고, 침묵이 그 뒤를 이었다. 나는 그 침묵 앞에서 오래 서성였다. 며칠 뒤, 그 강아지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아무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밥상 위에 놓인 냄비가 모든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숟가락을 들지 못했고, 어른들은 '아직 어려서 그렇다'며 웃어넘겼다. 그러나 그때의 냄새는 지금까지도 나의 기억 속에서 부패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오늘날 삼겹살집에서, 혹은 치킨 상자를 열 때마다 나는 그 기억의 편린과 마주한다. 허기를 달래면서도 어딘가 찜찜한 감각.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으나, 먹는 순간마다 누군가의 목숨을 삼킨다는 사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이 흔들림이야말로 먹는 인간으로서의 나를 구성하는 본질일지 모른다. 인간이란 결국 그 균열을 외면하고 싶어 하면서도, 끝내 외면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개인적인 흔들림은, 실은 문명이 지닌 거대한 모순과 맞닿아 있다. 보신탕과 염소, 삼겹살과 치킨. 우리는 먹는 선택 위에 문명을 세웠고, 그 선택은 늘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공장식 축산, 초대형 유통망, 글로벌 소비 체계는 단순히 '더 많은 사람을 먹이기 위해' 발전했지만,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생명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었다.
윤리의 균열은 이렇게 사회적 규모로 확대된다. 인간은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여기지만, 그 도덕은 선택적이다. 일부 생명은 보호하고, 일부는 소비한다. 호모 카르니보루스는 단순히 먹는 인간을 넘어, 선택과 무관심, 합리화가 뒤섞인 문명의 산물인 것이다.
나는 성찰한다. 우리가 염소의 울음과 삼겹살의 기름 냄새 사이에서 진보를 말할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진보라고 부르는가? 더 건강한 삶, 더 윤리적 소비, 혹은 단지 불편을 다른 대상에게 전가하는 새로운 방식일 뿐인가? 문명은 언제나 자기 합리화의 구조 속에서 유지된다. 그 위에 놓인 것은 우리 모두의 선택이자, 무수한 생명의 희생이다.
결국 남는 질문은 단 하나다.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그 선택 속에서 어떤 인간, 어떤 문명을 만들어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