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보:
- 제목: 한국이란 무엇인가
- 저자: 김영민
- 출판일: 2025년 4월 10일
- 장르: 인문
며칠 전 인터넷에서 정치 뉴스를 봤다. 기사보다 댓글이 더 많았다. 대부분 상대편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내용이었다. 정책이 좋은지 나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더 도덕적으로 올바른지를 다투고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를 심판하기 시작했을까. 김영민의 『한국이란 무엇인가』를 집어 든 건 이런 답답함 때문이었다.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
책을 읽다가 가장 먼저 멈칫했다. "한국은 원래부터 정해진 게 아니었다. 시대마다 다른 '한국'을 상상했고, 그들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것이었다."
나는 얼마나 자주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로 생각을 회피해왔던가. 1995년에 입사해 25년간 직장 생활을 하며, 나는 소위 '한국적 조직 문화'의 파수꾼이었다.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는 젊은 후배들에게 나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국 직장은 원래 이런 문화야. 적응하는 게 실력이야."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내가 '전통'이라 믿으며 강요했던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 만든 기획의 산물이었다면, 우리도 다시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김영민은 박제된 유물에 매달리지 말라고 말한다. 이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유튜브에는 중도가 없다
저자는 요즘 한국 사회를 "도덕의 정장을 입고 싸우는 곳"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날카롭게 묻는다. "당신은 토론을 원하는가, 아니면 당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확인받고 싶은가?"
유튜브를 켜보면 이 진단은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곳엔 '중도'가 없다. 상대를 절멸시켜야 할 악(惡)으로 규정하는 극단적 목소리들만 알고리즘을 타고 넘쳐난다. 합리적 대화가 설 자리는 없고, 누가 더 선명하고 자극적으로 상대를 비난하느냐가 정의의 척도가 된다.
이것은 400년 전 조선의 선비들이 누가 더 성리학적으로 올바른지를 다투며 상대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갔던 당쟁의 21세기 버전이다. 김영민은 이를 '제도는 근대인데 정신은 전근대'라고 진단한다. 껍데기는 민주주의 국가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누가 더 옳으냐'를 다투는 도덕 재판을 벌이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적 반대자를 정책의 파트너가 아닌 '부도덕한 적'으로 몰아간다. 이것이 바로 그 증거다.
1987년 광장에서
나는 1987년 6월 항쟁 때 대학생이었다.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광장에서 외쳤다. "민주화!" 그때 우리는 확신했다. 민주화만 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하지만 김영민은 묻는다.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민주화'란 무엇이었나. 그건 정해진 답이 아니라, 그 시대가 필요로 했던 '한국'의 한 버전이었다는 것이다.
예순이 되어 돌아보니 알겠다. 우리는 늘 '진짜 한국'을 찾느라 바빴고, 내가 믿는 한국만이 진짜라고 우기며 살아왔다. 60년을 한국에서 살았지만, "당신은 어떤 한국을 상상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 적이 없었다. 주어진 정답을 맞히느라 내 몫의 질문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브런치에 쓸 다음 글
저자는 '개혁'이나 '정의' 같은 낡은 언어로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단어들은 이미 진영의 깃발이 되어버렸다. 대신 그는 우리에게 유연한 사유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언어를 제안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내가 브런치에 쓰는 글들을 떠올렸다. 나는 너무 오래 답만 주려 했다. 이제는 질문을 던져야겠다. 브런치에 올릴 다음 글은 무엇을 써야 할까. '60대의 삶'이라는 주제로 쓰고 있지만, 이제는 질문을 던져야겠다. "우리는 어떤 노년을 원하는가?" 같은 질문 말이다.
예순의 발견
은퇴 후 홀로 살면서 나는 처음으로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창밖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30년 넘게 매일 아침 집을 나섰는데, 동네 골목이 이렇게 생겼는지 예순이 되어서야 처음 알았다. 경쟁에서 내려온 후에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저자는 한국을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과정으로 보라고 말한다. 완성된 국가가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 만들어가는 동적인 실험이라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나는 은퇴 후 스며들던 무기력을 걷어낼 수 있었다. 한국이 그러하듯, 내 예순의 나이 또한 정지된 점이 아니라 여전히 전개 중인 이야기로 느껴졌다.
이 책을 권하고 싶은 사람
이 책은 쉽지 않다. 김영민 교수의 글은 명료하지만, 다루는 주제가 무겁다. 역사, 철학, 정치를 넘나든다. 하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나처럼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한국 사회를 경험하고, 이제 조금 거리를 두고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이들은 내가 살았던 한국과는 다른 한국을 만들어갈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한국을 원하는가.
책을 덮으며
나는 어떤 한국을 상상하고 있을까. 그리고 내 글을 통해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답은 아직 없다. 하지만 이제는 질문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