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보:
- 제목: 인간제국 쇠망사
- 저자: 헨리 지
- 출판일: 2025년 9월 26일
- 장르: 과학
퇴직금 정산서를 받아든 날, 나는 25년이 한 장의 종이로 정리된다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회사에서 임원까지 했지만, 마지막 1년은 분명 이전과 달랐다. 중요한 결정에서 내 의견은 빠졌고, 신규 프로젝트는 젊은 임원에게 넘어갔다.
"상무님, 요즘 어떠세요?"라는 인사만 늘어났다.
조심스러운 배려였지만, 그것이 이별을 준비하는 방식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헨리 지의 『인간제국 쇠망사』를 읽으며 떠올린 것도 바로 그 시간이었다.
저자가 말하는 '멸종 부채'와 내가 경험한 '퇴직 부채'는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우리는 운 좋은 종일뿐이다
이 책은 인류를 '제국'이라 부르면서, 그 쇠망을 동시에 예고하는 역설로 시작한다. 저자는 부상–쇠락–탈출이라는 3부 구조를 통해 호모 사피엔스의 전 생애를 부검한다.
비관론처럼 들리지만, 나는 이것을 냉정한 현실 진단으로 읽었다.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정중한 거부.
제1부 '부상'에서 저자는 인류를 '운 좋은 종'으로 규정한다. 특별한 목적으로 설계된 존재가 아니라, 다만 도구와 불이라는 우연한 발견 덕분에 지배자가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문득 내 얘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5년의 회사 생활을 돌아보니, 임원까지 오른 일 역시 운이 컸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부서에 있었고, 회사가 성장하던 흐름을 탔으며, 선배들이 이미 길을 만들어두었다.
나는 오래도록 나를 '노력한 사람'이라 불러왔다. 이제야, 그 말이 얼마나 많은 운에 기대고 있었는지 알겠다.
승자독식의 역설
승자독식 구조가 멸망의 씨앗을 품는다는 저자의 지적도 와 닿는다. 모든 자원을 독점한 종은 환경이 바뀔 때 가장 먼저 무너진다.
임원이 되면서 나는 더 많은 정보와 권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중요한 회의에만 불려 다녔고, 대화의 상대는 늘 같은 임원들이었다.
그 사이 현장은 조용히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익힌 방식은 제조업 시대의 언어였고, 디지털 전환기의 속도와 방향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렇게 과거의 성공 방정식은, 어느새 현재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다.
멸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제2부 '쇠락'에서 나는 멈춰 섰다. '멸종 부채'라는 개념 앞에서였다.
서식지 가용성이 임계점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종의 멸종은 이미 결정된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번영은, 시간차를 두고 나타나는 착시일 뿐이다.
"현재의 번영은 착시일 뿐이다."
나는 이 문장 앞에서 한참을 멈췄다.
임원이 된 뒤에도 나는 여전히 잘나가고 있었다. 팀원들은 내 말을 들었다. 결재 라인에는 내 이름이 있었다. 연봉도 괜찮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 이미 내 자리는 사라지고 있었다.
회사는 세대교체를 준비하고 있었고, 조직은 슬림화되고 있었으며, 내가 하던 일들은 시스템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멸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지만, 번영의 관성 속에서 나만 몰랐던 것이다.
적응의 역설
더 섬뜩한 것은 '적응의 역설'이다. 과거에 우리를 구원했던 특성이, 미래에는 오히려 족쇄가 된다는 주장이다.
25년간 내가 익힌 것들—대면 소통, 종이 결재, 긴 회의, 수직적 보고 체계—은 모두 아날로그 시대의 방식이었다. 메신저로 일하고, 재택으로 협업하며, 빠르게 결정하는 세상에서 내 경험은 자산이 아니라 짐이었다.
인류도 마찬가지다. 수렵채집에 최적화된 뇌와 단기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은 기후위기의 시대와 맞지 않는다.
탈출이 아니라 변질
제3부 '탈출'에서 저자는 희망마저 차단한다. AI든 우주 진출이든, 어떤 기술적 도약으로도 멸종 부채를 탕감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생명을 연장할수록 인간성은 소멸하고, 결국 다른 존재로 치환될 뿐이라는 것이다. "탈출이 아니라 변질"이라는 표현이 날카롭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저자와 다른 길을 택하고 싶다.
퇴직 후, 나는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임원 시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것 역시 일종의 '변질'이다.
그러나 나쁘지 않다.
직함은 사라졌지만 자유를 얻었고, 권한은 없지만 진정성을 찾았다. 인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변한다 해도, 우리가 소중히 여겨온 가치들을 계승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지속'일 것이다.
파티가 끝나고
"인류 제국은 지구라는 거대한 유람선에서 무단 침입한 승객들이 벌인 짧고 소란스러운 파티와 같다. 파티가 끝나고 우리가 떠난 뒤에야 비로소 배는 평온한 항해를 계속할 것이다."
이 비유를 읽고, 한참 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퇴직 후 나는 나만의 파티를 정리하고 있다. 명함과 거래처 연락처, 회사 이메일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파티의 화려함이 아니라, 떠날 때 남기는 흔적이라는 사실을.
성과만 내고 떠날 것인가, 아니면 후배들에게 뭔가 남겨주고 떠날 것인가.
남는 것은 이야기다
임원이 된다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한때는 더 높이, 더 멀리 가지 못한 게 아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인류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나 역시 내가 속한 세계의 꼭대기에 있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것.
지질학적 시간으로 보면 인류는 찰나고, 회사 역사로 보면 나의 25년도 한순간이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을 어떻게 건너왔는지는 여전히 중요하다.
이 책은 불편하다. 인간의 특별함을 믿고 싶은 우리에게, 당신은 그저 평범한 종일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때문에 읽어야 한다. 진실은 대개,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나는 이제 브런치에 글을 쓰며 의미를 찾고 있다.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해, 언젠가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내고 싶다. 임원 명함은 버렸지만, 에세이스트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인류의 제국도, 한 개인의 삶도, 결국 남는 것은 이야기다.
파티가 끝나갈 때, 우리는 무엇을 정리하고 떠날 것인가.
『인간제국 쇠망사』는 그 질문을 던진다. 나는 파티의 뒤편을 정리하며 떠날 것이다.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