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때의 우리

by 건강한 오후

택배 포장을 열었을 때, 처음엔 책 제목이 낯설었다. '가녀장의 시대'. 소녀가장 이야기인가, 아니면 엄마가 가장이면 '가모장'이라 해야 하지 않나. 이슬아라는 이름도 처음이었다. 브런치 독서클럽의 '지역서점 지키기' 챌린지 이벤트에 당첨되어 날아온 선물이었으니, 그러니 나는 완전 백지 상태로 책을 펼쳤다.


책을 읽는 동안 자꾸 웃음이 났다. 소설인데 시트콤 같았다. 주인공 웅이가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는 장면에서 나는 잠시 책을 덮었다. 나도 그렇다. 국민학교 친구를 만나면 나는 국민학생이 되고, 중학교 친구를 만나면 중학생이 된다. 고등학교 친구들 앞에서는 지금도 열아홉이다. 그 시절의 우리가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올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4월에는 '메모리얼 데이'도 계획하고 있다. 작년엔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도 했으니, 우리는 이제 기념하는 나이가 되었다. 2월 28일 토요일, 친구들과 경남 남해 독일마을 입구에 있는 이원장의 세컨하우스, 우리 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남해 별장'이라 부르는 그 집에서 바비큐 파티를 열기로 했다. 고기 굽는 연기 냄새, 오래된 농담들, 그리고 40년 치 살아온 이야기들.


친구들은 고기 생각에 신났지만, 나는 가는 길에 들를 곳이 하나 더 있었다. 아마도 책방. 이번 독서 챌린지 이벤트에 선정된 남해의 지역서점이다. 차 안에서 혼자 설레고 있자니, 누군가 물었다. "거기 밥은 먹을 수 있어?" 내 브런치 구독자는 친구 중 단 한 명뿐이다. 나머지는 책방 이름을 식당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족구 거리를 걷다 마주친 아마도 책방은, 선물 받은 책의 표지 그림과 닮아 있었다. 하얀 외벽, 작은 간판. 문을 열고 들어서니 10평 남짓한 공간이 펼쳐졌다. 빽빽한 책장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낡은 타자기였다. 책마다 책방지기가 직접 한 글자씩 눌러 쓴 소개글이 붙어 있었다. 나는 한참을 서서 그 문장들을 읽었다. 안쪽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한다. 처음엔 아쉬웠지만, 이내 그것이 배려라는 걸 알았다. 렌즈가 아니라 눈으로 보라는. 그래서인지 그 순간만큼은, 내가 사진 한 장 대신 문장 한 줄을 들고 나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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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지기 박수진 대표에게 말을 걸었다. 브런치 이벤트로 '가녀장의 시대' 스페셜 에디션을 선물 받아 읽었고, 그래서 이 책방을 찾아왔다고. 그녀는 웃으며 내가 고른 책에 사인을 해주었다. 펜으로 눌러 쓴 사인 아래, 이런 문장이 있었다.


"강건중님, 각자의 모양대로 진주에서도, 남해에서도 잘 해 먹고 살아요 :-)

2026년 2월, 수진 드림"


'아마도 책방'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남해에 내려와 "앞으로 뭐 해 먹고 살 거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서 왔다고 한다.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도 책방을 할 것 같아." 불안하다고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니까. 나도 은퇴 후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 그랬다.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도 글을 쓸 것 같아.


세컨하우스로 돌아오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친구들은 이미 고기를 굽고 있었다. 40년 전 이야기가 나왔다가, 누군가의 자식 이야기가 나왔다가, 또 언제 모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책방 얘기를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각자의 모양대로 살고 있으니까. 책 읽는 나도, 고기 굽는 친구들도. 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이 사람들은 기록하지 않아도 잘 살아가고 있구나.'


이슬아의 소설 속에 이런 문장이 있다. "살다 보니까 그냥 알게 됐지, 뭐." 책 중간 중간에 반복해서 나오는 말인데, 읽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40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기록하는 사람과 기록하지 않는 사람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아마도'로 시작한 것들이 가장 오래간다는 것. 그리고 각자의 모양대로 사는 것이, 사실은 가장 잘 사는 것이라는 것.


아마도, 그것이 그때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가 된 방식이다.



2026년 2월, 남해에서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