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기 전에

by 건강한 오후

진주에서 청암까지 한 시간. 핸들을 쥔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25년간 명함을 쥐고, 결재 서류를 넘기며, 핸들을 돌리던 손의 완고한 습관이었다. 친구의 집 마당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엔진 소리가 툭, 끊어졌다. 그제야 들렸다. 청암 계곡의 물소리가. 소리는 비어 있는 엔진의 소음 사이를 빠르게 채워 나갔다. 친구는 대문 앞에 서서 손을 들어 보였다. "왔나." 그것으로 족한 인사였다.


친구의 집 뚝배기에서는 짐승의 뼈를 오래도록 고아낸 냄새가 났다. 내가 도망쳐 온 도시의 냉랭한 콘크리트 냄새와는 다른, 눅진하고 비린, 그러나 오래된 위로의 냄새였다. 열린 창틈으로 4월의 물소리가 들이닥쳤다. 귀로 듣는 봄의 냄새였다. 친구는 말없이 국자를 저을 뿐, 나의 근황을 묻지 않았다. 25년을 규정했던 명함과 완장의 무게는 끓는 국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친구는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국물을 뚝배기에 담아 내 앞에 놓았다.


"식기 전에 들어라.“


그 한마디가 국물보다 먼저 나를 감쌌다. 뜨거운 액체를 목으로 넘길 때, 나는 내 안에서 얼어붙어 있던 날카로운 말들을 함께 삼켰다. 국물은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에 닿기까지 제 온기를 잃지 않았다. 그것은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타인에게 내어주는 가장 낮은 형태의 인(仁)이었다. 밥알을 말아 넘길 때마다 어깨에 얹힌 도시의 짐들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새벽 세 시. 친구가 잠든 사이 방을 나섰다. 지리산 자락의 4월 새벽 공기는 칼날 같았다. 방금 전까지 친구가 내어준 방바닥의 온기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냉기가 폐부 깊숙이 박혔다. 자전거에 올라 회남재를 향했다. 길은 정직했다. 밟는 만큼 나아갔고, 멈추는 만큼 밀려났다. 세상의 모든 직급과 권위가 통하지 않는 곳, 오직 중력과 근육만이 대화하는 영역이었다. 땅의 힘을 거스르는 일은 이제 오직 나의 육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첫 번째 급경사에서 기어를 낮췄다. 두 번째 급경사에서 또 한 단을 낮췄다. 세 번째 급경사부터는 더 이상 낮출 기어가 없었다.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늑골을 둔탁하게 때리는 소리가 고요한 산길에 울려 퍼졌다. 페달을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무릎 관절에서는 마른 나무가 꺾이는 듯한 삐걱거림이 전해졌다. 예순을 바라보는 이 몸은 더 이상 성과 지표로 환산될 수 없는, 늙고 정직한 덩어리였다.


회사에서는 늙음을 은폐해야 했다. 염색으로 흰머리를 가리고, 성과로 건강함을 증명하며, 야근으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 오르막은 속일 수 없었다. 늙은 근육은 늙은 대로 경직되었고, 쇠한 심장은 쇠한 대로 터질 듯 요동쳤다. 오르막은 잔인할 만큼 투명했다. 허벅지가 돌처럼 굳어갈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지금까지 쥐고 있던 완장들이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는지를. 페달은 땅에 박힌 쇠말뚝처럼 무거웠지만, 그것을 밀어 올리는 고통만이 내가 지금 이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땀이 눈을 찔러 시야가 흐려졌지만, 정신은 오히려 서늘할 정도로 맑아졌다.


회남재 정상에 섰다. 자전거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거친 숨을 골랐다. 발아래 악양의 들판이 어둠을 벗으며 서서히 펼쳐졌고, 저 멀리 섬진강이 하얀 실처럼 아득하게 흘러갔다. 4월의 햇살이 강물 위에서 부서지며 윤슬을 만들어냈다. 한참을 그렇게 주저앉아 물을 마셨다. 다리의 떨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바람이 땀을 앗아갔다. 정상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었다. 내가 그토록 치열하게 매달렸던 25년의 정점들도, 여기서 보니 저 강물처럼 가늘고 희미했다. 올라온 길을 확인하고 나니, 비로소 내려갈 길이 보였다.


내리막길에서 나는 페달을 놓았다. 바퀴가 중력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스스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며 귓가에 굉음을 냈다. 오르막이 온몸의 근육을 태워 무게를 견디는 시간이었다면, 이 내리막은 모든 저항을 멈추고 흐름에 순응하는 시간이었다. 땀방울이 바람에 날아가며 피부 위로 서늘한 해방감이 번졌다. 한 방울씩 흘려보낸 땀 속에 섞여 있던 25년의 명함들이 아스팔트 위에 점으로 남았다가 이내 증발했다. 비워내는 것이 곧 채워지는 것임을, 중력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르쳐주고 있었다.


다시 청암으로 돌아왔다. 출발했던 그 자리였다. 자전거의 흙 묻은 타이어가 마당의 돌 위에 멈춰 서며 슥, 하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 나는 땀을 식히며 자전거를 조심스럽게 옆으로 눕혔다.


국물은 뼈를 우려내고, 식히고, 다시 끓이며 제 맛을 찾아간다. 자전거 바퀴도 떠났던 곳으로 매번 돌아온다. 우정도 그렇다. 떠나도 돌아오고, 식어도 다시 데워진다. 친구가 내어준 국물과 내가 홀로 도는 이 궤도는 같은 리듬으로 나를 살게 한다. 나가고 돌아오는 이 반복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다.


친구가 마당 평상에 막걸리 주전자를 올려두고 있었다. 그는 땀에 젖어 돌아온 나를 보고 씩 웃으며 사발을 채웠다.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친구 곁에 앉았다. 시큼하고 텁텁한 막걸리가 식도를 타고 시원하게 내려갔다. 빈 사발을 내려놓자 친구가 다시 술을 채웠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마당에 앉아 저녁 햇살이 길게 누워가는 것을 보았다. 지리산 자락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자 계곡 물소리가 아까보다 더 크게 들려왔다.


마당 한쪽, 우리가 비워낸 뚝배기에서 아직 연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희미한 김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내일도 나는 이 길을 달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 국물이 식기 전에.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