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보:
- 제목: 『제자리에 있다는 것』
- 저자: 클레르 마랭
- 출판일: 2025년 5월 12일
- 펴낸 곳: 에디투스
- 장르: 인문 교양
2020년 봄이었다.
퇴직하고 처음 맞은 계절. 오랜 지인이 식당에서 옆 테이블에 나를 소개했다.
"제 친구입니다."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25년 동안 나는 늘 무언가의 '누구'였다. 대리님, 과장님, 상무님. 그날 처음으로 나는 그냥 '나'였다.
홀가분해야 했는데 — 왜인지 발이 무거웠다.
그로부터 6년이 흘렀다.
자전거를 탔고, 강을 달렸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조회수 열다섯 중 열 번이 내 클릭이었던 첫 글에서, 지금은 100편을 넘게 썼다. 그래도 그 감각은 가끔 돌아왔다. 자리를 잃었다는 것. 직장이라는 자리가 아니라 — 나라는 사람의 자리가.
올해 2월, 도서관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작년 봄에 나온 책이었다. 제목이 먼저 나를 붙잡았다.
『제자리에 있다는 것』
서가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클레르 마랭은 프랑스 철학자다.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에디투스에서 나온, 얇은 책이다. 한 시간이면 다 읽힌다.
나는 사흘이 걸렸다.
자꾸 손이 멈췄다. 문장 때문이 아니라 — 생각 때문에.
소란스럽지 않은 책이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런데 읽고 나면 조용히 뭔가를 건드려놨다. 결론이 기억나는 게 아니라, 읽는 중간에 멈춘 순간들이 기억나는 책이다.
마랭은 처음부터 선언하듯 말한다.
세상은 당신을 위한 자리를 준비해두지 않았다고.
처음엔 차갑다고 느꼈다.
두 번 읽으니 — 이상하게 편해졌다.
내 탓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돌아보면 계획대로 된 게 거의 없다.
첫 직장도, 살게 된 동네도, 지금 이 글쓰기도. 다 그렇게 흘러왔다. 젊었을 때는 그게 부끄러웠다. 남들은 다 설계가 있는 것 같았다. 로드맵, 목표, 5년 후 비전. 나는 늘 조금 늦게, 다른 방향으로 왔다.
책 중반쯤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는 어쩌다 보니 여기 있게 된 것이다."
짧은 문장이다.
그런데 이 문장 앞에서 한참 앉아 있었다.
그 말이 실패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솔직한 고백처럼 들렸다. 25년 직장인이 쉰여덟에 글을 쓰게 된 것도 그랬다. 브런치 작가 신청란에 직함 대신 "명함을 버리고 내 이름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적었을 때. 계획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됐다.
마랭은 그것을 실패라고 하지 않는다.
이동이라고 한다.
혼자 이 책을 읽었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책을 폈다. 외롭냐고 물으면 — 가끔은 그렇다고 답하겠다. 그러나 그것보다 자주 드는 감각이 있다.
선명하다.
혼자인 2월의 저녁, 마랭의 문장들이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그냥 넘겼을 것들이 혼자라서 걸렸다.
마랭은 책 어딘가에서 시몬 베유의 말을 꺼낸다.
"뿌리 내림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이해받지 못하는 인간의 욕구다."
이 문장을 읽다가 창밖을 봤다.
아침마다 앉는 창가 자리. 매주 같은 길로 페달을 밟는 강변. 강물 소리가 두 바퀴 아래로 흘러갈 때, 몸이 먼저 자리를 잡는 기분이 든다. 그 감각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 이름을 몰랐다.
거창한 게 아니었다.
뿌리란 — 이런 것들이었다.
마랭은 이렇게도 썼다.
"이 장소가 내 소유가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통해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소유가 아니라 존재.
강변을 달릴 때, 창가에 앉을 때 나는 그냥 나다.
직함도 없고 역할도 없는 — 그냥 나.
2020년의 나였다면 이 책을 다르게 읽었을 것이다.
퇴직하던 그해, 이 문장을 만났다면 아마 분노했겠지. 세상이 내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으니 내가 더 싸워야 한다고. 6년이 지나 읽으니 — 안도다. 내 탓이 아니었다는 것. 이미 충분히 이동해왔다는 것.
같은 문장인데, 다른 나이에 읽으니 전혀 다른 위로가 된다.
이게 좋은 책의 조건이다.
나는 요즘도 글을 쓴다.
직함도, 역할도 사라진 자리에서 유일하게 흘러넘치는 것이 이것이었다. 마랭이 말한 '흘러넘침'이 이런 건지도 모른다. 자리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된 것들.
이 글도 그중 하나다.
마랭은 끝내 정답을 주지 않는다.
제자리가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한다 — 자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계속 자리를 바꿔나간다고.
그 말이 위로가 됐다.
6년 전에 잃은 것들이 떠올랐다. 직함도, 역할도, 어떤 관계도. 어쩌면 잃었던 게 아니라 — 다른 자리로 이동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자리가, 어쩌면 내가 오래 찾던 자리다.
반납 기한이 2주였다.
책은 제때 돌려줬다.
그런데 몇몇 문장은 아직 돌려주지 못했다.
당신은 지금 제자리에 있습니까.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면 — 이 책을 권한다.
이런 분께 건네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느낀 적 있는 분.
자리를 잃은 것 같아 불안한 분.
그리고 — 여기까지 오는 데 계획 같은 건 없었다고 느끼는, 우리 모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