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를 통제하면 생각도 통제된다
위선적인 양반이 호랑이에게 목숨을 구걸하다 통렬한 꾸짖음을 듣고, 하찮게 여겨지던 똥 치우는 이를 스승으로 모신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속 파격적인 상상력이다. 그런데 이 자유로운 글쓰기는 당대 최고의 개혁 군주가 직접 나서 "잡스럽다"라고 금지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정조, 규장각을 세우고 수원 화성을 쌓은 성군(聖君)의 빛나는 치세 이면에 드리워진 낯선 그림자, 바로 1792년에 단행된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개혁을 외치던 군주는 왜 당대 최고 문인의 글쓰기를 금지했을까.
정조가 문제 삼은 것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타나는 자유분방한 문체와 이덕무의 생동감 넘치는 소품문이었다. 겉으로는 "문장이 바르지 못하면 도가 바르지 못하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문제의 본질은 문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용과 사상이었다. 1780년대 후반, 북학파 지식인들은 청나라를 통해 천주교와 실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접했다. 자유롭고 풍자적인 문체는 통제할 수 없는 사유의 통로가 되어, 새로운 사상을 퍼뜨릴 위험이 있었다. 정조는 이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정조실록 1792년 4월 기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패관소품의 문체는 이단의 학설을 싣는 그릇이다." 문체 교정은 명분일 뿐, 본질은 권력이 원치 않는 사유의 확산을 막기 위한 선제적 검열이었다.
문체반정의 여파는 소수 문인의 문체 변경으로 그치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 박지원조차 이후 『열하일기』와 같은 파격적인 글쓰기를 중단했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이제 붓을 들 때마다 혹시 문제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라고 고백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자기 검열 문화의 확산이었다. 문인 스스로 붓을 들기 전에 '이 표현이 괜찮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이다. 독창적인 시도는 위험으로 인식되었고, 안전하고 규범적인 글쓰기만이 장려되었다. 문체반정 이후, 박지원의 글에서 호랑이가 위선자를 꾸짖던 통렬함과 파격은 사라졌다. 가장 무서운 검열은 칼을 든 권력이 아니라, 붓을 들기 전에 스스로를 검열하는 작가였다.
권력은 시대와 이름을 바꾸며 늘 그렇게 '올바름'을 규정해 왔다. 23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시대에도 '문체반정'의 구조가 반복되고 있지는 않을까.
오늘날의 '올바름'은 '정치적 올바름', '사회적 합의', '혐오 표현 방지' 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물론 혐오와 차별을 막으려는 사회적 노력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선의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올바름'을 정의하고 소수의 표현을 억압하는 또 다른 권력이 될 때, 이는 정조 시대 문체반정과 같은 구조가 된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경험을 한다. "이 말은 혐오 표현이 아닐까?" "이 표현은 누군가를 불쾌하게 하지 않을까?" SNS에 글을 올리기 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문제 될 만한 부분'을 찾아 지운다. 말하기 전에 먼저 검열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문체는 단순한 글쓰기 방식이 아니다. 문체는 사유의 방식이다. 표현을 제한하면 생각도 제한된다. 가장 위험한 검열은 권력의 칼이 아니라, 우리가 글을 쓰기 전에 스스로 생각을 검열할 때 일어난다.
정조는 진보를 원했다. 단, 자신이 그어놓은 안에서만. 그 결과 조선 후기의 가장 창의적인 지식인들이 붓을 꺾었다.
나 역시 글을 쓰며 '이 표현은 꼰대의 푸념처럼 들리지 않을까?' '혹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진 않을까?' 스스로 펜을 멈칫한 순간이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쓰지 않기로 한' 문장들 속에 진짜 창의성이 숨어 있지는 않은가?"
진정한 발전은 다양한 목소리들의 불편한 공존에서 시작된다. 물론 그 자유가 타인의 존엄을 해치는 혐오의 언어까지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의 '올바름'이 창의적 사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문체반정은 아닌지 성찰해 볼 때다. 표현의 자유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시대를 전진시킬 유일한 토양이며, 자유로운 사유만이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