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선 시간, 영원히 흐르는 기억
아버지의 서랍을 정리하는 날, 내 마음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복잡했던 장례 절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마주한 아버지의 방은, 그분이 떠난 흔적들로 가득했다. 하나씩 물건들을 꺼내보며 덤덤하게 추억을 되짚던 중, 깊숙한 서랍 한구석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하나 발견했다. 잠시 망설이다 상자 뚜껑을 열었을 때, 낡은 가죽 밴드와 유리에 작은 흠집이 선명한 오래된 손목시계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부터 늘 아버지의 손목에 매달려 있던 그것, 금세 닳아버려 너덜거리던 내 장난감 시계와 달리, 아버지의 시계는 언제나 견고하고 믿음직스러웠다. 빛바랜 다이얼 위로 시곗바늘은 멈춰 있었다. 멈춘 시각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때였다. 나는 한동안 시계를 내려놓지 못했다.
시계를 조심스럽게 꺼내 손목에 걸었다. 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피부에 닿는 순간, 묵직한 무게가 전해졌다. 단순히 시계의 물리적인 무게가 아니었다. 지난 세월 동안 아버지의 삶의 무게를 함께 지탱해 온 듯한, 묵직하고 단단한 존재감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여전히 째깍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의 증인이었다. 창밖에서는 새소리가 들리고, 아파트 복도에서는 이웃의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내 손목 위의 시계만은 단호하게 그 순간에 고정되어 침묵하고 있었다.
눈을 감으니 아버지의 모습이 여러 겹으로 겹쳐졌다. 고향에서 농사일을 돕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 땀 흘리던 그분의 굵은 손목에 늘 차여 있던 이 시계.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던 내게, 아버지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조용히 시계를 가리키곤 했다.
"아직 시간 있다. 조급해하지 마라."
그 말처럼 아버지는 늘 시간을 천천히 살아냈다. 서두르는 법이 없었고, 조급해하는 법도 드물었다. 밭을 일구는 농부처럼 묵묵히 제 시간을 견디고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느긋함조차 결국 멈춰야 할 순간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시곗바늘은 멈췄지만, 그 시간 속에서 살아온 아버지의 삶은 오히려 더 선명하고 묵직하게 다가왔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시계를 수리점에 가져가 다시 태엽을 감아 움직이게 해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멈춘 채로 두어야 할까? 태엽을 감아 시계가 다시 움직인다면, 그것은 과거의 시간을 잃고 현재의 시간에 편입될 것이다. 하지만 멈춘 채로 둔다면, 이 시계는 단순한 시간을 재는 도구가 아니라, 아버지가 살았던 삶과 그분이 남긴 마지막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 둔 시간 그 자체가 된다. 망설임 끝에 나는 멈춘 그대로 두기로 했다. 아버지가 떠나던 그 시각, 그 순간에 고정된 채로.
나는 그 시계를 서랍 속으로 다시 밀어 넣지 않았다. 대신 나의 책상 한편,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글을 쓰다 문득 고개를 들면, 멈춰 선 손목시계가 나를 응시한다. 그 시계는 아버지가 남긴 시간이 여전히 내 곁에 숨 쉬고 있음을,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변치 않고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묵히 일깨워준다. 그 멈춤은 결코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지속이었다.
시간은 흐르지만, 사람이 살았던 시간은 사물 속에 멈춰 남는다. 그 멈춤이 가장 온전한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