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의 깃발이 펄럭이는 거리

김훈이 본 현수막, 언어의 죽음

by 건강한 오후

김훈은 산문집 『허송세월』에서 거리의 현수막을 보고 이렇게 썼다. "현수막의 내용은 논리나 비유나 문맥이 성립되지 않는 욕지거리, 악다구니, 상소리, 저주, 증오, 과장, 거짓말, 가짜뉴스들이었다. 그것은 치매의 깃발처럼 대도시의 중심부에 봄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소설가가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는, 그러나 너무나 정확한 은유다. '치매의 깃발.' 논리도 문맥도 잃어버린 언어의 난무. 김훈이 현수막에서 본 것은 단순한 시각 공해가 아니었다. 그것은 언어의 죽음이었고, 사유의 붕괴였으며, 문명의 퇴행이었다.


언어의 장인이 본 언어의 타락


김훈의 문장은 한 글자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칼의 노래』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단 여덟 글자로 전쟁의 폐허와 생명의 역설을 담아낸다. 그의 언어는 정확하고, 간결하며, 진실을 향한다. 불필요한 수식을 거부하고, 과장을 배제하며, 본질만을 남긴다.


그런 그가 현수막의 언어를 보며 분노한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가 없고, 문맥이 없으며, 진실을 향하지 않는다. 오직 상대를 향한 증오와 저주, 과장과 거짓만이 난무한다.


현수막의 문구를 보자. "○○○ 탄핵하라", "△△△는 매국노", "××당은 국민의 적." 이것은 주장이 아니라 욕설이고, 논리가 아니라 악다구니다.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주하려는 것이다. 대화를 시작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끝내려는 것이다.


김훈이 평생 지켜온 언어의 존엄 앞에서, 현수막의 언어는 모독이다.


1970년대와 2025년, 반복되는 풍경


미술평론가 박영택은 1970년대를 회고하며 거리를 가득 메웠던 표어를 기억한다. "집 앞 골목길 청소하기", "쥐 잡기", "간첩 신고하기", "둘만 낳아 잘 기르기." 국가가 원하는 국민을 만들기 위해 일상의 모든 공간을 점거했던 그 문구들. 박영택은 그것을 "국가 이데올로기의 강압적인 주입"이었다고 기억한다.


2025년, 현수막은 여전히 거리를 점거하고 있다. 다만 주체가 바뀌었을 뿐이다. 국가 대신 정당이, 국민 계도 대신 정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형태는 달라졌지만 본질은 같다. 일방적이고, 강압적이며, 피할 수 없는 메시지의 폭력.


1970년대 표어는 국가가 국민을 향해 던진 명령이었다. 2025년 현수막은 정당이 상대를 향해 던진 저주다. 그 시절 우리는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국민"이 되라는 강요를 받았다. 지금 우리는 "저쪽을 증오하라"는 강요를 받는다.


5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현수막의 나라에 산다.


현수막이 말하는 것: 대화의 종말


현수막은 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일방적 선언이다. 묻지도 않고, 듣지도 않으며, 오직 외친다. 반박의 여지를 주지 않고, 논쟁을 허락하지 않으며,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그저 지나가는 모든 이의 시선을 붙잡고 자신의 메시지를 강제로 주입한다.


이것은 공론장의 붕괴를 의미한다. 공론장이란 서로 다른 의견이 대화를 통해 경쟁하고 설득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현수막은 대화를 거부한다. 논리 대신 욕설을, 설득 대신 저주를, 이성 대신 증오를 내세운다.


김훈은 이렇게 썼다. "그 현수막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나라가 돌이킬 수 없이 쓰레기통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쓰레기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가 죽고, 대화가 사라지며, 오직 증오만이 남은 곳이다. 서로를 설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공존할 수 없는 곳이다.


현수막은 우리가 그곳을 향해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침묵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현수막 없는 거리를 상상한다. 고요하고, 깨끗하고, 사유할 수 있는 거리. 지나가는 이들에게 욕설을 던지지 않고, 증오를 강요하지 않으며, 거짓을 퍼뜨리지 않는 거리.


김훈이 평생 지켜온 것은 언어의 존엄이다. 그것은 정확한 언어, 진실한 언어, 사유하는 언어다. 현수막은 그 모든 것의 반대편에 있다. 부정확하고, 거짓되며, 사유를 거부한다.


우리에게는 침묵의 권리가 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거부할 권리, 강요된 메시지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고요한 거리를 걸을 권리. 현수막은 그 권리를 침해한다.


박영택은 말했다. "표어나 현수막이 많은 나라는 후진국이다." 맞는 말이다. 선진국은 시민을 신뢰한다. 그들 스스로 판단하고, 사유하며,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후진국은 시민을 불신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구호를 외치고, 표어를 내걸며, 현수막을 펼친다.


김훈의 '치매의 깃발'은 여전히 봄바람―아니, 가을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우리는 언제쯤 그 깃발을 내릴 수 있을까. 언어의 존엄을 되찾고, 대화의 공간을 회복하며, 고요한 거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