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 인생’ 손석희에 대한 오마주
【0】나는 보도윤리나 보도가치 등을 논할 실력이 전혀 안 된다. 언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견과 가치관이 없다. 대학 졸업학기 “냉철하며 따뜻하게 한국 교육을 보듬고 싶다.”라고 허울뿐인 명분을 내세우며 EBS PD에 지원해 보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서류에서 떨어졌다.
다만, 관찰자로서 나는 적는다. 1956년생, 손석희 JTBC 보도 담당 사장에 관한 이야기다.
【1】 “... 손석희 신임 JTBC 보도담당 사장이 13일 서울 순화동 JTBC 사옥으로 첫 출근을 했다. 이날 자신의 승용차로 출근한 손 교수는 JTBC 간부들과 경영위원회를 갖는 것으로 첫 일정을 시작했다...”
[Link :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15&aid=0002879656]
【2】 “뉴스 9 앵커는 내 커리어의 마지막. 스트레스로 새벽에 식은땀 흘리며 깬다” (2013-09-03)
[Link :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47&aid=0002033313]
― 시민사회 편에 서서 얻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무엇을 얻겠다는 것이 아니다. 언론은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을 얻겠다고 하는 순간 오히려 잃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 지금까지는 (손 사장이) 뉴스 콘텐츠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영진이 할 이야기가 없었을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좀 달라지지 않겠나. 삼성 등 대기업 문제에서 경영진과 충돌하는 이슈가 생기면 어떻게 하겠나. 합리적 시민사회 편에 설 수 있겠나. (“삼성으로 상징되는 대기업 문제는 팩트가 있으면 반드시 다룬다. 그건 제가 과거 MBC에서 <시선집중>을 진행했을 때와 같다. <시선집중>에서 다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팩트가 있다면 다룬다.”)
― 한 종편채널 앵커는 나름대로 여야 균형을 맞춘 보도를 하겠다고 야권인사들을 섭외하지만 정작 야권인사가 출연하면 시청자들의 비난이 거세, 차라리 시청자들의 입맛에 맞춘 사람들을 섭외한다고 했다. 방송은 시청자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데 JTBC도 그 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닌가. (“JTBC는 어떤 진영에도 속해 있지 않을 것이다. 굉장한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일부에서는 ‘결국 그래봐야 누굴 위한 거냐, 장사논리 아니냐’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까도 이야기한 것처럼, JTBC 뉴스는 진영논리에 속해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진영 논리에서) 상당 부분 벗어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앞으로 JTBC는 점점 더 진영 논리에서 벗어날 것이다. 합리적이고 건강한 시민사회는 진영 논리 속에 있지 않다. 제가 여태까지 30년간 <시선집중>, <100분토론>을 진행해오면서 이 기준을 벗어난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제가 혹시 능력이 모자라 잘 못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해오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제가 너무 모든 걸 자신감 있게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걱정이 많다. 이 모든 것에 대해 걱정이 많다. 솔직히 말하면 새벽에 식은땀과 함께 잠에서 깬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다. 안 그렇겠나.”)
― 끝으로, 꼭 묻고 싶은 게 있다. MBC는 왜 그만두었나.
“나는 MBC에서 30년을 일했다. 떠나왔어도 거긴 내 고향이다. 고향에 대해선 누구나 좋은 기억을 남겨두고 싶어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3】 “웬만하면 자기 자랑은 뉴스에서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만, 오늘(30일)은 좀 예외로 하겠습니다. 바로 시청자 여러분께서 평가해주신 내용을 시청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저희 JTBC가 시청자 여러분께서 꼽은 가장 공정하고 유익한 방송사에 선정됐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해 지상파와 종합편성 채널을 통틀어 조사한 결과인데요. JTBC는 신뢰성과 공정성, 공익성, 등 7개 조사 분야에서 모두 1위에 올랐습니다. 한 채널이 7개분야 모두에서 1위를 석권한 것은 2010년 조사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Link : https://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0828590]
【4】 손석희 파업 시절 이야기
[Link : http://cokcok.tistory.com/1426]
【5】 “... 손석희를 의식 있는 이들이 기억하는 것은 1992년 9월 2일부터 50여 일 간 뉴스·드라마의 제작 거부 등 전면 파업에 돌입했던 와중에 그가 노조원으로 참여했던 일이다. 그는 그 일 때문에 몇 년을 메인 프로그램에 나오지 못했다. 그는 저서 《풀종다리의 노래(1993)》에서 방송민주화와 사회민주화에 대한 감성적이지만 결연한 의지를 비추었다. 이러한 전력 때문에 그가 진행하는 시사 토론 프로그램에서 내꽂는 말들이 진실로 다가왔던 것이다. 행동과 말이 일맥 요연하게 일치됨을 느끼기 때문이다. 같은 말과 비판이라도 누가 하는가에 따라 의미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왜 잘못된 점을 바꾸지 않고 질타하면서 정작 자신이 몸담고 있는 방송국의 모순과 문제를 바꾸지 않고 학교로 가는 것. 이것은 아무래도 도피로 보이는 이유가 된다. MBC를 떠나 교수로 재직하며 프로그램은 계속하는 것이 정치적 전략이라는 음모론이 타당성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 “박수칠 때 떠나라”는 타당하니 말이다...”
― 김헌식(2006-02-01), “손석희, MBC 바꾸지 않고 도피하는 것인가”
[Link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
【6】 손석희(1993), 《풀종다리의 노래》 pp. 242~247
구십이년 가을의 파업이 끝나고, 구치소에서 나와 회사로 돌아온 나는 며칠 후 무심코 노조 사무실의 내 책상 서랍에서 한 편의 원고를 발견하였다.
<풀종다리의 노래>란 제목으로 씌어진 이 자그마한 얘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또 숙연하게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원고를 소중한 선물로 간직하기로 했다.
아쉬운 것은 지은이의 이름이 어느 데에도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선배나 후배사원 중의 어느 누가 보내준 것일까, 아니면 조합원은 아닐지라도 방송사에서 일하는 스크립터일까. 궁금증에 지쳤을 때쯤, 나는 차라리 익명의 누구인가에게 내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 연말에 『말』지에 실린 내 대담기사 가운데, 내가 받은 원고에 대한 얘기가 나가자, 생각지도 못한 부산 문화방송에서 전화가 왔다. 내게 전화를 한 그 조합원은 자신이 있는 부산 문화방송에 그 글의 지은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본인이 밝히려 하지 않지만 대신 알려주겠다고…. 이 글의 지은이는 부산 문화방송의 배익천 조합원이다.
그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아동문학가이기도 하다. 내가 다음날 그에게 전화를 하자, 그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로 그랬다.
“언제 한번 오면 연락하소. 쏘주나 한잔 하입시다.”
나는 그 말투와는 천양지차인 그의 섬세한 마음씀씀이에 감사한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그의 글을 옮긴다.
풀종다리의 노래
― 돌아온 동료들에게 ―
<꿀벌의 친구>
목소리 고운 풀종다리 한 마리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풀종다리 중에서 제일 목소리가 고운 풀종다리였습니다. 죄명은 목소리가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었습니다. 풀숲왕국 풀무치 대왕의 명령이었습니다.
풀무치 대왕 목소리는 지독한 쇠목소리였습니다. 얼마나 지독했던지 곁에서 듣고 있으면 듣는 쪽 목이 꺽꺽했습니다.
풀무치 대왕은 그 지독한 쇠목소리로 온갖 명령을 다 내렸습니다.
“이 풀숲에서 제일 부드럽고 맛있는 풀은 내 것이니 너희들은 그 곁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나는 대왕. 너희들은 내 말을 하늘같이 믿고 따르도록 해라!”
하더니 끝내는
“내 왕국에서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것을 잡아 감옥에 가두도록 해라!”
하고 명령했습니다.
순전히 자기가 노래를 못 부르는 것에 대한 분풀이라고 풀벌레들이 수군거렸습니다.
꺽꺽한 쇠목소리를 내는 풀무치 대왕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풀종다리는 너무너무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긴 수염을 첼로 모양으로 늘어드리고 휘리리리 휘리리리 부르는 풀종다리의 노랫소리는 풀숲왕국 풀벌레들의 마음을 아늑하게 만들었습니다.
풀숲왕국 풀벌레들은 풀종다리의 노래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풀종다리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면 어느새 온갖 풀벌레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풀종다리의 목소리가 곱고 노래를 잘 불러서만이 아니었습니다. 노래 잘 부르기로 친다면 옛날부터 베짱이를 따른 풀벌레가 없지만 풀종다리의 노래는 베짱이 노래하고는 달랐습니다.
풀종다리는 풀벌레들이 하고 싶은 말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길고 긴 더듬이를 곤두세워 풀숲왕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내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주세요.”
방아깨비가 와서 방앗간 이야기를 하면 풀종다리는 쿵더쿵 쿵더쿵 흥겨운 방아타령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을까요?”
날개까지 누런빛으로 변한 삽사리가 불개미떼들의 습격을 받은 이야기를 하면 풀종다리는 불개미떼들이 인정사정 없는 악독한 도둑떼라는 것을 노래로 만들어 불러주었습니다.
“하늘이라고 마음대로 날아다닐 것이 아니에요.”
연두빛 날개가 아름다운 풀잠자리가 거미줄에 걸렸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이야기를 하면 풀종다리는 거미들이 얼마나 엉큼하다는 것을 노래로 만들어 불러주었습니다.
풀종다리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목소리가 고운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지만 풀벌레들의 온갖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것이 풀무치 대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고얀 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제멋대로 노래를 지어 불러!”
풀무치 대왕은 호위병으로 쓰는 송장메뚜기들을 동원하여 풀종다리를 잡아가두던 날, 꽁무니를 씰룩거리며 분을 삭였습니다.
풀종다리가 잡혀갔다는 소문이 온 풀숲왕국에 퍼졌습니다.
“노래는 함부로 부르는 게 아니야.”
대장 여치가 여치들을 불러모아놓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이럴 땐 노래 못 부르는 것도 큰 복이란다.”
어미 무당벌레가 새끼 무당벌레에게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베짱이나 여치 중에는 아예 노래가 못 나오게 날개를 묶어두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일부러 쇳소리를 내는 풀벌레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느새 유행이 되어버렸습니다.
풀숲왕국에서 유행하는 노래는 꺽꺽한 쇳소리의 노래였습니다.
자기들의 목소리는 숨기고 풀부치 대왕의 목소리를 흉내낸 꺽꺽한 쇳소리였습니다.
풀무치 대왕 앞에서는 모두들 엉터리 노래를 불렀습니다.
‘진작 잡아가둘걸’
풀무치 대왕의 마음은 흐뭇했습니다. 그러나 풀무치 대왕의 그 기분도 잠시뿐이었습니다.
“풀종다리의 노래가 없으니까 세상이 깜깜한 것 같애.”
“풀종다리가 그렇게 우리의 좋은 친구인 줄은 몰랐어.”
“이건 분명히 풀무치 대왕의 음모야. 우리들의 귀를 못쓰게 만들려는 술수야.”
꺽꺽한 쇳소리만 떠돌던 풀숲왕국 여기저기에서 뜻있는 풀벌레들의 낮은 목소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함께 풀종다리 마을에서도 두런두런 낮은 목소리가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풀죽어 있을 때가 아니야.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노래를 불러야 해.”
“맞아. 먼저 잡혀간 친구를 위해서라도 노래를 불러야 해.”
풀종다리들의 친구들이 머리를 맞대며 한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왕국에서는 우리들의 노래를 다시 듣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이 계속해서 노래를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헤치고 커다란 목소리 하나가 높이 솟아올랐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우리의 노래를 불러줄 친구를 뽑아야합니다.”
“맞습니다!”
“뽑아야 합니다!”
“당장 뽑읍시다!”
수군거리던 목소리들이 일제히 일어섰습니다.
“맞아요. 뽑아야 해요. 하나씩 하나씩 우리 모두가 뽑혀나가 우리의 노래를 부르다가 우리 모두가 잡혀간다고 해도 이 풀숲왕국을 위해 노래 부를 친구를 뽑아야 해요!”
모여 있던 풀종다리들은 작은 탄성을 지르며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는 힘찬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자 우리 모두
닫힌 입 열어주고
막힌 귀 뚫어주는
노래 부르러
휘리리리 휘리리리
어느새 모여들었는지 풀종다리들 주위에는 온갖 풀벌레들이 모여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풀종다리들의 노래를, 풀숲왕국을 위한 노래를.
【7】 허수경(2004), 《눈 들어 소나무 솔잎을 보니》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나는 최대한 씩씩했지만, 그와 그의 아내는 나의 진실을 간과할 리 없었다.
(……)
그들 부부의 침실 창으로 목을 내놓고 미네소타의 낯선 밤바람을 맞으며 어질어질하도록 담배를 피웠다. 끝까지 모른 척해 주는 그들 부부가 너무 고맙고 또 미안해서 나는 밤새 울었다. 잠을 뒤척이고 홀로 일찍 일어나 화장실을 가는데 아이들 방문이 열려 있었다. 좁은 방 벽에 붙은 이층 침대에선 두 아들이 곤하게 자고 부부는 바닥에 요 한 장 깔고 웅크려 자고 있었다.”
(※ 아나운서 허수경이 〈손석희, 붉음이 치켜드는 푸르른 깃발〉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 허수경이 이혼 서류를 정리하기 전, 온갖 복잡함을 견디지 못하고 방황하다 미네소타에서 유학 중이던 손석희 부부를 찾아갔던 일화.)
【8】 손석희, 「지각 인생」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내가 지각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 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늦다 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 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그래서인지 시기에 맞지 않거나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을 가끔 벌이기도 한다. 내가 벌인 일 중 가장 뒤늦고도 내 사정에 어울리지 않았던 일은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일일 것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 십수 년 하면서 마련해 두었던 알량한 집 한 채 전세 주고 그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그 와중에 공부는 무슨 공부. 학교에 적은 걸어놓되 그저 몸 성히 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셋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 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 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 저녁에는 근처에서 사 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 다 늦게 무엇하는 짓인가 하는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 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두 시까지 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 학위? 그것은 종이 한 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 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방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인생을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