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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턍규 Aug 01. 2016

대학교와 콩나물시루 (2005)

[1]

“여러분, 대학교(大學校)는 어떤 곳입니까?”


늦여름, 나른해하는 학생들의 눈빛을 간파하신 老교수님께서 나를 비롯한 학생들에게 물으셨다. 순간 나 자신에게 들리는 목소리는 이런 것들이었다.


대학교, 초중고 12년을 꼬박 투자해 내가 지금 몸담은 이곳, 한때 교수가 꿈이었던 나에게 선망의 미래이자 의지의 대상물, 한 곳에서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해 투쟁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안정된 직업을 위해 검은 활자와 씨름하는, 드넓은 동시에 좁은 공간, 진리의 전당, 자유의 공간, 역사의 투쟁터…. 


교수님은 그윽한 미소를 보이시면서 “대학은 콩나물시루입니다.”


[2]

콩나물을 키워보거나 혹 키우는 것을 구경해 본 사람이라면 의구심을 가져볼 법하다. 분명히 물을 주기는 주는 데 주는 족족 시루 밑으로 흘려보낸다. 검정 천으로 덮여 있지만, 그 사이에 콩나물은 ‘자란다, 자라고 있다’.


술자리 같은 곳에서 늘 하는 불평 중의 하나는 배우는 것도 없이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는 것이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데, 어설프게나마 선배 노릇도 해야 하고 곧 있으면 졸업을 한다. 내가 노땅이 되다니…. 배운 것도 하나 없고, 제대로 한 것도 하나 없는 것 같은 데 내가 노땅이 되다니…. 곧 있으면 직장을 가져야 하고, 가정도 생길 테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애늙은이처럼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영화 신라의 달밤에 나오는 대사처럼 “대학이 나에게 해준 게 뭐야?”를 되뇌곤 한다. 대학이 나에게 해준 게 뭘까? 내가 대학을 위해 해준 게 무엇인지를 물어야 하나?


[3]

콩나물이 어느 새에 자랐는지는 모른다. 늘 보면 그대로인 것 같고, 별로 하는 일 없이 어둠 속에서 물 몇 방울을 적시는데, 콩나물은 그 뿌리를 키운다. 


새내기 때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을 놓고 보면 미약하게나마 내 콩나물 뿌리가 자라 있음을 본다. 동경해 왔던 전혜린을 탐독해 보기도 했고, 20세기가 낳은 천재라는 케인스의 책도 읽었다. 술도 원 없이 마셔봤고, 전공과 전혀 관계없는 것들에 주말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능력의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한 숨도 쉬어 봤고, 때로 웃기도 했다. 기숙사 야식 단골 메뉴 ‘맹구 탕수육’의 전화번호도 이젠 외우고 다닌다. 혼자 여행도 떠나 봤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서 양손에 선물 보따리 들고 집에도 내려가 봤다. 그리고 군대라는 공간에서 처절하게 삽질을 해보기도 했다. 군인이 삽질하는데 이유가 있을까 하며…. 1학년에 입학해서 경제원론을 배우고 나서 세상의 모든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나의 치기를 늦게나마 깨닫고, 겸손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였다.     


누구에게도 있는 그대로 말해줄 수 없는, 어느 새 자랐는지 모르지만, 하루하루 버텨냈던 그 시절이 빚어낸 ‘내 삶의, 내 대학 생활의 콩나물 뿌리.’


[4]

대학 졸업반인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대학 새내기 때 미리 알았더라면 덜 고민하고, 덜 실패하고, 덜 비겁했을 것이다. 또 더 원활하고, 더 성공하고, 더 용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시행착오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지금 내가 내 가슴에 귀 기울이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고개 숙일 수 있는 약간의 여유는 그 시절의 실패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건방져 보이더라도 내 콩나물 뿌리에 후회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는 어느 시인의 말로 변명하려 한다. 


[5]

지금은 기력이 쇠하셔서 댁에서 쉬고 계시지만, 시골에서 몇십 년간 농사를 지으셨던 할아버지께서는 늘 “때”를 강조하신다. 해마다 한여름이면 잡초를 잡아야 하는데, 김을 맬 시기를 놓치면 그때부터는 잡초를 잡는 것이 아니라 잡초에 끌려다니게 되기 마련이라고. 세상에 어느 것이나 그 이름에 걸맞은 시의 적절한 때가 있다는 그 사실을.


김매는 때를 놓쳐 버리면 잡초에 모든 걸 내주어야 한다. 농사를 그르치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매한가지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시는 할아버지께서는 “물러서지 말고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살라.”라고 하신다. 있는 그대로 지금 이 순간을….


[6] 

살자. 지금 이 순간을. 우리가 무심코 물과 햇빛을 흘려 보내지만, 우리는 자란다. 후회하지 말자. 후회 말자. 돌이켜 보니 그 모든 시공간이 나를 빚는다. 있는 그대로, 물러서지 말고, 지금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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