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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턍규 Aug 17. 2016

정만원 부회장님을 추억하며 (2009)

위대한 리더에게 올리는 오마주

SK텔레콤은 33층 건물이다. 32층에는 CEO 집무실이 있다.


지난 1년간 1주일에 한 번씩 반복된 나의 일과.


월요일 08시, 아니 정확히는 07시 53분까지 CEO 집무실 옆 VIP 회의실에 가서 Weekly Report 11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의자는 기본적으로 9개를 관리 요원이 세팅해 놓기 때문에 뒤쪽에서 2개를 내와서 11개로 만들고 58분까지 들어오시는 임원들께 인사를 한다. 회의 준비에 더 이상의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면 28층 우리 팀으로 내려오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탄다.


그리고 한 주의 시작.


장황하게 기록해 두는 이유는 내 업무 중 하나였던 전사 주요 회의체 관리가 이제 팀의 다른 분께 넘어갔기 때문이고, 그것보다 내게 더 중요한 건 바로 그 VIP 회의실에서 오늘 2시간 동안 정만원 사장님의 바로 왼쪽 자리에 앉아 회의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주제는, 「SK텔레콤 중장기 전략 방향성」 관련 Ideation.


지난 한 해, 그토록 많은 날을 새며 고민했지만, 아직 갈피를 잡고 있지 못한 주제. 전략그룹장님, SK경영경제연구소 정보통신 연구실장님, 경영전략팀장님을 비롯한 팀원 9명이 자리에 참석했다. 사장님의 Thinking Partner이자, In-House Consultant로서 우리 경영전략팀이 SKT의 Vision 2020을 그려나가기 위한 첫 발자국, Kick-off Meeting.  


***


또다시 장황한 이유는SCH V-840.


요즘 길거리에서 간혹 공짜폰으로도 나오는 2005년 11월 출시된 (구형) 모델. 바로 왼쪽에 앉았기에 회의 시작과 함께 사장님께서 주머니에서 꺼내 두신 휴대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장님은 어떤 휴대폰을 쓰실?


수억 원의 연봉, 혹은 수십억 원의 Incentive를 받는 SK그룹에서 가장 잘나가는 CEO. 재학 중 CPA 합격, 회계법인에 들어간 후 5개월 만에 퇴사. (이유는, “새롭고 창의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이후 창의적인 일을 하려면 공무원이 제격이라는 친구의 말에 행정고시 준비 시작, 7개월 만에 수석 합격. 문교부, 동력자원부/통상산업부(現 지식경제부)의 스타급 공무원. 제1, 2차 Oil Shock 당시 석유 가격 담당 사무관. 재직 중 NYU Stern MBA 졸업. 16년 만에 사직서 제출. (이유는, “새롭고 창조적인 생각이 필요 없는 업무 같아서!”) 퇴사 후 프랜차이즈 커피숍 창업 시도. 하지 동력자원부 국장의 지속적 설득으로 퇴직 후 2개월 만에 선경그룹 경영기획실 이사 대우 입사. 이후 OK캐쉬백 기획, SK(주) 복합 네트워크 담당 상무, SK텔레콤 인터넷 사업부문장, 또 소버린 사태 이후 워크아웃에 들어간 SK네트웍스(前  SK글로벌)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1년에 책을 100여 권씩 읽으며 리더십을 비롯한 경영에 대해 연구하고 구성원과 ‘소통’한 끝에 4년여 만에 경영 정상화/워크아웃 졸업/국내 기업 매출 기준 6위/포춘 선정 세계 438위 달성(2007년).


그리고 2009년 1월 1일, SK텔레콤 복귀 및 대표이사 사장 취임. SK텔레콤의 사장님께서 현재 쓰고 계시는 폰이, 내 동생이 2년 전에 사서 쓰면서 너무 후져서 얼른 바꾸고 싶다는 폰과 같다. SCH-V840.


『정만원을 읽으면 e-Business가 보인다』의 표지에 실린 그의 사진을 자세히 보자.



보이는가? 무엇이?


오늘 회의가 끝나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오가는 가운데 집에 와서 다시 꺼내 들었던 책. 예전에는 노란 “주유용 총”이 가장 눈에 들어왔지만, 지금은 사장님의 저 사진에서 주름 가득한 바지와 색이 바랜 “벨트”가 눈에 들어온다. 벨트 구멍이 한 칸 늘어난 것으로 보아, 배에 살이 쪘겠지. Hermes나 Bally는 물론 아닐 테고, 심지어 금강제화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대충 사서 차고 있는 “만원” 짜리 정도 되어 보이는 저 벨트.


2시간 동안 완벽한 논리 흐름과 적절한 위트, 정확하고도 예리한 분석과, 미래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넘치는 Insight가 내가 오늘 그분께 느꼈던 전부였다면 그냥 나는, 그냥 나는 열심히 따라가는 수준이었겠지. 하지만, 저 위치에 올라서도 온몸으로 보여주는 저 검소함과 솔선수범. (그가 늘 강조하는 Servant Leadership) 바로 그 이유로 내가 주인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역시 그가 늘 강조하는 Dynamic Followership)


좋은 리더가, 존경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동시에 이렇게 온 마음으로 존경할 만한 그 누군가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복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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