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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덕후 Jan 08. 2019

선택이 어려운 진짜 이유;다른 하나를 버린다는 것

에세이#1

씁슬한 지점에서 시작하다


 이 첫 번째 에세이는 내가 2017년 6월에 회사를 그만두고 카페를 차리기로 결심하고 난 후에 적었던 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카페를 차리지 못하고 회사로 돌아왔다. 그래서 이 글을 다시 볼 때면 나는 어쩐지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카페 주인을 꿈꿨던 나는, 지금은 항공사에서 일하며 매달 세계의 훌륭한 커피를 찾아 일종의 월드 카페 투어 World Café Tour 를 하며 지내고 있다. 언젠가는 이 경험들이 내 꿈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교각이 되어줄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지내는 중이다.


그런데 문득, 문득 생각이 나면 사실은 조금 슬프다. 어떤 의미에서는 꿈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선택이 어려운 진짜 이유


 고등학교 시절 선택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스물다섯 살의 순박한 청년 김선명이 해방이 되던 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다는 말에 매료되어 북한을 선택했으나, UN군에게 생포된 후 총 43년의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독립영화이다.  


 이 영화를 내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영화에 나온 한 대사가 어쩐지 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해서 두 번은 생각하지 않게 되는 그런 것들이 있다.

 

나에게는 이 ‘선택’이란 것이 그랬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여러 가지 후보들 중에 가장 좋은 한 가지를 고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영화 속에 이 대사를 만난 것이다.


선택이란 하나를 고르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른 하나를 버리는 것임을 이제야 알았다


 이 한 문장이 어찌나 심오한 느낌으로 다가왔던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 머릿속을 며칠 동안이나 빙빙 맴돌았다. 그래, 선택이 어려웠던 진짜 이유는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었을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과연 그렇다. 여러 가지 중에 제일 좋은 하나를 고르는 게 선택이라면 고민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제일 좋은 하나를 고르고 덜 좋은 하나를 그 이후에 고르면 되니까. 복잡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 대개 우리가 선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맥락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제일 좋은 하나만을 고르고 덜 좋은 하나는 버려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선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에피파니(Ephipany)의 순간이랄지. 너무나 당연해서 두 번은 생각하지 않던 ‘선택’의 의미에 대해 우연한 기회로 두 번 생각하게 된 결과 이후의 내 인생에서 선택의 메커니즘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제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이제 나는 버려질 것에 대해 고민한다. 좋아하는 것을 고른다고 가정했을 때 정답처럼 느껴지는 선택이, 다른 하나를 버린다고 생각했을 때는 완벽한 오답이 되기도 한다는 걸, 나는 이때 깨달았다. 덜 좋지만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그리고 때로는 그 버릴 수 없는 것이야 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란 것을 나는 이때 알았다.

 

 시간이 지나 나는 대학에 들어가 여러 값진 경험들을 했으며 운이 좋게도 원하는 회사에 취업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2년 반을 다니다 나는 회사를 버리기로 결심했다. 회사가 주는 경제적인 안정성, 대기업 사원이라는 주변의 인정 그리고 90%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이것이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이런 많은 가치들을 버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가치가 있는 것이든 쓸모없는 것이든, 일단 두 손으로 무엇인가 꽉 쥐고 있으면 다른 것을 잡을 손이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러한 가치들을 손에 꼭 쥐었을 때 버려야 하는 다른 선택지는 무엇일까?


내 꿈.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잘할 수 있다고 믿는 일.


이 중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그저 나의 상상에서 나온 기대에 찬 미래일 뿐이다. 실체가 없는 이러한 가치들과 현재 내가 실제로 누리고 있는 회사가 주는 가치 중에 좋아하는 것을 고른다고 생각했다면 끝내 후자를 골랐을지 모르겠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최승자 시인의 말처럼, 나는 결국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만 하니까. 무엇을 버려야만 한다면? 아 그렇다면, 나는 도저히 내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 꿈은 아직 실현된 적이 없기 때문에 말 그대로 가능성이다. 나는 내 삶의 가능성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


 내 꿈이 이 회사를 다니는 것이라면, 하루하루가 그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현실에선 일이라는 것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란 결국 경제적 가치다. 부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돈 이상의 가치를 위한 삶을 살기를 바랄 테니까. “나는 내 일을 사랑해!”라고 외치는 이에게 그렇다면 경제적 가치를 제거해도, 돈을 한 푼 받지 않아도 그 일을 할 용의가 있는가?라고 묻고 싶은 것이다. 혹은 내가 지금 ‘사랑한다고 믿는’ 그 일과는 완전히 상반된 어떤 일을 한다면 지금 받는 월급의 3배를 준다고 할 때에도, 지금 내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 일을 하겠다고 당당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사랑하는 일은 정말로 그 일 자체인가? 아니면 경제적 가치를 얻어주는 도구로서의 일인가? 후자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리고 누가 그것을 비난하겠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문제는 사실 그게 아니다.

내 개인적인 좁은 경험에 기반한 시야에서는 회사원의 99%는 결국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여기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일을 사랑해!라는 외침은 명백한 자기기만이다(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 기만의 대가는 그의 삶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들의 상실은 아니었을까. 내가 정말 이 일이 좋아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인지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선택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경제적 가치를 좇을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을 것인가?


 좋아하는 일이 없다면? 혹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회사에 남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결코 버리고 살아갈 수 없는 다른 선택지가 존재한다면? 치열하게 고민해보고 용기를 한 번 내 볼만 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내 어릴 적 기억엔 커서 회사원이 되고 싶다고 말한 친구는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 다들 유치하나마 저마다 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친구들이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사람이 되려 한다는 것을 걱정한다. 살다 보니 우리는 다 비슷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꼭 한 번쯤 모두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이게 정말 나의 꿈인가?

아니면 사회의 꿈인가?

나는 나의 꿈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꿈을 버릴 것인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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