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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덕후 Jan 12. 2019

최선은 최악에서 나오는 법; 12.99불 짜리 바리깡

호주 워킹홀리데이 이야기#4

다음 날 아침 애나 Anna는 나에게 그의 친구 존 John 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존은 시드니 Sydney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평생을 살다 은퇴한 후에 이 곳 누사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직접 방문해보니 존의 집은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큰 느낌이었다. 2층짜리 집이었는데 1층에는 꽤 큰 방 2개와 화장실이 있었다. 집 거실에 놓인 작은 액자들과 벽에 걸린 액자 속에 존과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성과 찍은 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사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곳을 떠날 때 까지도 굳이 사진 속의 주인공에 대해서 묻지 않기로 했다. 애나는 존에게 내가 그곳에 머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고, 존은 나를 직접 보고 같이 살아도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오늘 만남의 주된 이유였다. 


존은 굉장히 다부진 체격에 UFC 선수 같은 느낌을 풍기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2층에 있는 넓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 존과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 중 갑자기 존은 짐을 나에게 가지고 오라고 했다. 합격. 그렇게 나는 존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저렴한 가격에 1층의 방 2개와 화장실이 딸린 공간을 나 혼자 쓸 수 있었다. 2개의 방 중에 하나가 특히 채광도 잘 되었고 울창한 나무들이 창 너머에 즐비했다. 나는 고민 없이 이 곳에 짐을 풀었다. 


선샤인 코스트 누사에서 내가 머물던 방



너무나 멋진 곳이었는데, 당시에는 당장 일자리를 구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사진으로 남길 여유조차 없었던 것일까. 아무리 찾아보아도 찍어둔 사진이 없다. 서두에서 내가 단 돈 150만 원만 가지고 왔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누사에서 사용할 교통카드를 구매하고 한 달치 숙소비를 내고 나니 남은 돈이 얼마 없었고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비싼 밥을 먹는 것도 사치였다. 이때부터 내 주식은 마트에서 2불짜리 딸기 잼과 1불짜리 식빵이었다. 가끔 사치를 부리고 싶은 날에는 햄과 양상추를 사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정도였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 실전이었다. 미리 준비해 간 이력서를 들고 식당과 카페를 돌아다녔다. 사실 나는 이때까지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무슨 쓸데없는 고집이었는지 당시에 나는 이력서에 거짓을 입히기가 싫었고, 결국 내 이력서의 경력은 공란으로 남겨두었다. 자, 이제 누사의 식당 혹은 카페 주인들은 동양에서 온 뜬금없는 청년에게 일자리를 줄 것인가? 예상이 되다시피 정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여기에는 사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내가 앞서 “나의 도시 선정 기준은 한 편으로는 매우 간단했고 지금 돌아보면 아주 어리석었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 이유이기도 하다. 이 누사라는 곳은 휴양지였기 때문에 성수기/비수기로 극명하게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다. 비수기에는 일자리가 거의 없었고 심지어 있던 일자리들 마저도 다 사라지는 시기였다. 내가 누사에 갔던 때는 아주 정확히 성수기가 끝나고 비수기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다니던 숲길


일주일 이상을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하고 이력서를 돌린 결과 마침내 인도인 사장이 운영하는 인도 레스토랑의 디시 워셔 Dish Washer 자리를 구했다. 사장은 하루에 딱 2시간만 나에게 일을 주었다. 정말 얄미운 것은 그 2시간 내내 1분도 쉬는 시간이 없게끔 그날 하루 종일 쌓인 설거지 거리를 내가 올 때까지 손도 안 대고 그대로 쌓아 놓는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시급도 호주의 법정 최저 시급보다 훨씬 낮은 금액인 12불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통장 잔고는 바닥이 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부당함을 견뎠다. 좋은 점을 굳이 하나 꼽자면 가끔 퇴근할 때 재스민 라이스 Jasmine Rice 혹은 코코넛 라이스 Coconut Rice 와 양고기 카레 혹은 소고기 카레와 난을 싸주었다는 점이다. 주인이 얄미워서 정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음식은 솔직히 정말로 맛있었다. 



누사의 흔한 풍경



‘이대로는 안 되겠다’ 하고 결심한 것은 퇴근 후 누사헤드의 해변가에서 혼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였다. 부끄럽지만 내가 호주에 오기 전에 품었던 낭만적인 모습과는 너무 다른 허름한 현실이 야속해서 눈물도 (조금, 아주 조금) 흘렸다. 다음 날 일어나서 근처 마트에 가서 12.99달러 짜리 바리깡 하나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마침 호주에 오기 전에 원빈 주연의 ‘아저씨’라는 영화를 봤었고, 영화 속에서 원빈이 비장한 각오를 하며 머리를 깎는 모습을 생각하며 머리를 밀었다. 나도 원빈처럼 서서 머리를 깎고 싶었는데 코드 선이 너무 짧았다. 어쩔 수 없이 거울 앞에 신문지를 깔고 쪼그려 앉아서 머리를 깎기 시작했다. 내 손으로 내 머리를 밀어 보는 게 처음이라 머리가 들쑥 날쑥이었다. 결국 바리깡 앞에 높이 조절하는 틀을 다 빼고 3mm 길이로 밀어 샴푸도 필요 없는 전설의 ‘빡빡이’가 되었다. 이때부턴 정말 진퇴양난의 각오로 달려들었고 호주인이 운영하는 키쿠 KIKU 라는 아시안 누들 테이크 아웃 전문점에 일자리를 구했다. 무려 일을 배우는 동안에도 시급 18불을 받았다. 오지잡 Aussie Job 이라니! (호주인들은 스스로를 오지라고 부르는데, 호주인 주인 밑에서 정상적인 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곳을 흔히들 오지잡이라고 부른다. 오지잡과 대비되는 말은 캐시 잡 Cash Job으로 내가 일했던 인도인 주인 혹은 한국인과 같이 호주인 아닌 주인 밑에서 최저 시급 이하를 현금으로 받는 일자리를 말한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한 가지 단점은, 숙소에서 자전거를 타고 약 30분을 달려야 하는 먼 거리라는 점인데 뭐 이 정도야 누사의 멋진 풍경을 보며 운동하는 거라고 합리화를 하고 나니 그리 나쁜 조건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호주에서 집 렌트비와 식비를 버는 데 성공했다.


살아남았다, 다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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