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마른하늘에
갑자기 굵어진 빗줄기
으레 짐작으로
소나기라고 추정하여
그늘막에서 비를 피했으나
그 비는 내가 피할 수 없을 정도의
강풍을 동반한 세찬 비
피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내 모든 것들을 흠뻑 적셔버렸다
그때서야 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젖고 나서야 난 포기할 수 있었고
나아갈 수 있었다
이미 내 모든 것이 젖었기에
역설적으로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고
나는 세찬 발걸음으로 발 디딜 수 있었다
내가 만약 젖지 않았다면
난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네 삶이 그렇다
젖지 않으려 아우성을 쳐봐도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세찬 빗줄기는
나를 젖게 만든다
하지만 우린 나아가야 한다
젖고 축축한 발걸음이지만
한 걸음씩 딛어야 한다
지나간 후회와 회한에서
벗어나려면
진창길이라도 내 발걸음으로
그 길 위에 서야만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때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