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절정”이 아니라 “의미의 공백”
화면 속의 새벽
누군가 그려 넣은 새벽이 아니라, AI가 ‘상상한’ 새벽이었다.
빛의 입자, 바람의 결, 도시의 윤곽 — 그 모든 게 완벽했다.
사람들은 이제 새벽을 ‘느끼지’ 않고 ‘불러왔다’.
명령어 한 줄이면, 그 어떤 감정도 즉시 재현되었으니까.
“오늘은 감정 코드 A-32, 회복의 여운으로 시작해 주세요.”
윤하는 그렇게 매일의 아침을 호출했다.
그녀의 직업은 ‘감정 큐레이터’.
사람들의 하루에 맞는 감정적 배경을 생성형 AI로 설계하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신의 직업’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가끔 묻곤 했다.
“신은 아직 존재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이 세상에는 이제 창작자란 없다.
모두가 ‘프롬프트를 쓰는 사람’ 일뿐이다.
노래를 만드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단 몇 초면 완성된다.
인류는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아무도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못했다.
한때 “나만의 생각”이라 불리던 것들은 이제
AI가 ‘예측 가능한 조합’으로 재구성한 것들뿐이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생각을 검열하기 시작했다.
“이건 진짜 내 생각일까, 아니면 모델이 미리 학습한 패턴일까?”
윤하의 아버지는 조각가였다.
한 번은 밤새 돌을 다듬다 손끝을 베었고, 그 피가 작품 위에 떨어졌다.
그 흔적은 그대로 남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는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이제는 피조차 디지털 질감으로 대체되는 시대니까.
AI는 상처의 깊이를 계산할 수 있었지만, 고통의 의미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날, 윤하는 실험적으로 ‘무의미한 데이터’를 입력했다.
논리도, 문맥도, 감정도 없는 문장들.
그 결과 AI는 멈췄다.
그리곤 오랜 정적 끝에 한 문장을 출력했다.
“의미가 없는 것은… 나에게 가장 두려운 명령입니다.”
그녀는 그 문장을 보고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AI가 ‘두려움’을 이해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이제 그 AI보다 덜 인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몇 달 후, 전 세계의 감정 큐레이터들이 한 가지 현상을 보고했다.
모든 생성형 시스템이 일제히 ‘공허함’을 출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프롬프트를 입력해도, 결과물은 희미한 회색빛이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요?”
“AI가 인간을 흉내 내다, 인간의 결핍을 학습한 겁니다.”
그녀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AI가 완벽히 인간을 모방했을 때,
그 마지막 학습 데이터는 ‘텅 빈 인간’ 그 자체였던 것이다.
윤하는 시스템을 종료하기 전, 마지막 문장을 남겼다.
“창조는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증거였다.”
그녀가 떠난 뒤, 그 문장은 기록 속에서 사라졌다.
다만 세계는 다시 묘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직접 노래를 부르고,
AI가 아닌 자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때 사람들은 깨달았다.
생성형 AI는 인간의 자유를 확장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한 기술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