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무것도 되지 않으려는 사람들

인간의 자유와 존재의 공허함

by Bird

1. “모든 문이 열려 있다.”


세준은 매일 아침, 침대 옆의 홀로그램 보드를 본다.

보드는 그날의 추천 경로를 제시한다 —

오늘은 “건축가 모드”, 어제는 “소설가 체험”, 그 전날은 “요리사 미션.”


AI 플랫폼 ‘BeAnything’은 누구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을 약속했다.

직업, 감정, 정체성까지 몇 초 만에 불러올 수 있는 완전한 자유.

하지만 세준은 여전히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그 문 앞에서 서 있었다.


“오늘은 뭘 해볼까?”

“추천 경로가 1,024가지 있습니다. 어떤 삶을 원하시나요?”

“글쎄… 아무것도.”


AI는 잠시 멈췄다.

“아무것도”라는 단어는, 알고리즘이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었다.


2. “무엇이든 가능하지만, 아무것도 진짜가 아니다.”


사람들은 직업을 ‘경험’하고, 관계를 ‘시뮬레이션’했다.

사랑은 알고리즘으로 최적화되었고, 실패는 자동으로 보정되었다.


실패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배우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가는 대신, 삶을 ‘재생’했다.


세준은 가끔 생각했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진짜일까, 아니면 시스템이 추천한 감정일까?”


그는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농부였다.

새벽마다 논으로 나가 손으로 흙을 뒤집던 사람.

그 흙 냄새 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세준은 그 단단함이 부러웠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났지만,

그는 단 한 가지도 자신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3. “선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어느 날, 시스템이 물었다.


“새로운 정체성을 선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 그냥 이대로 둘게.”


그는 로그아웃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냈다.

아무 역할도, 아무 이름도, 아무 목표도 없이.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세상은 조용히 아름다워 보였다.

누구의 추천도 없었고, 어떤 결과도 기대되지 않았다.

그저 빛, 바람, 사람의 소리만이 있었다.


세준은 그때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무엇이 되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4. “자유 속에서 운명을 잃은 시대에 대하여.”


며칠 후, 플랫폼은 그를 “비활성 사용자”로 분류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세준 님,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면 시스템 접근이 종료됩니다.”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좋아요. 드디어 진짜 자유가 오겠네요.”


그 말이 남긴 잔향은 오래도록 서버에 남았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에서, 새로운 업데이트가 시작되었다.


Patch Note v9.3 — “무(無) 상태 실험 모드 추가”


세준의 공백은 데이터가 되었고,

그의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이제 또 다른 선택지가 되었다.


5. 에필로그


백년 뒤, ‘BeAnything’의 박물관에는 한 문장이 전시되어 있었다.


“모든 문이 열려 있을 때, 인간은 문 밖으로 나가는 법을 잊는다.”


사람들은 그 문장을 보며 잠시 멈췄다.

그것이 예언이 아니라,

이미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모두가 만든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