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가 없다
은행 IT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새로운 기술을 보면 먼저 설레기보다
“이번엔 얼마나 오래갈까”를 먼저 계산하게 된다.
희망보다 경험이 앞서는 직업병이다.
오픈뱅킹이 그랬고,
마이데이터가 그랬다.
그리고 요즘 회의실을 떠도는
‘KRW 스테이블코인’이라는 말도
나는 왠지 익숙한 얼굴처럼 느껴진다.
이건 전혀 처음 보는 미래가 아니다.
이미 한 번 지나온 길이다.
오픈뱅킹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금융이 완전히 바뀔 거라고 말했다.
데이터가 열리고, 은행의 벽이 허물어지고,
이제는 진짜 혁신이 시작된다고.
하지만 현장에서 본 현실은 조금 달랐다.
API는 열렸지만,
그 API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다.
제도는 있었지만,
사업은 늘 설명서 뒤편에 있었다.
마이데이터도 마찬가지였다.
‘데이터는 21세기의 원유’라는 문장은
프레젠테이션마다 등장했지만,
정작 그 원유를 어디에 쓸 것인지는
회의가 끝나도 늘 흐릿했다.
결국 우리는
“안전하게, 문제없이, 규정에 맞게”
데이터를 옮기는 기술만 남겼다.
돈을 버는 기술이 아니라
사고 나지 않는 기술만 발전했다.
이제 사람들은 말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미래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어진다.
이 나라는 이미
송금이 느리지도 않고
수수료가 비싸지도 않다.
카드를 긁어도, 계좌로 보내도
대부분의 불편은 이미 제거되어 있다.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은 무엇을 해결하려는 걸까?
아직 아무도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더 많은 규칙이 먼저 나온다.
누가 발행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무엇은 안 되는지.
이 흐름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이미 똑같은 장면을 봐왔기 때문이다.
한국 금융의 새로운 기술은
항상 이런 순서를 따른다.
먼저 제도가 등장하고,
그다음에 금지 목록이 생기고,
마지막으로
“그래서 이걸로 뭘 하지?”라는 질문이
뒤늦게 나온다.
그리고 그 질문에는
대부분 아무도 책임 있게 답하지 않는다.
기술은 인프라가 되고,
인프라는 의무가 되며,
의무는 비용이 된다.
혁신은 늘 문서 속에만 남는다.
나는 이제 안다.
이 나라에서 기술이 실패하는 이유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늘
“망하지 않기 위해” 기술을 만든다.
“잘되기 위해”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오픈뱅킹은 안전하게 남았고,
마이데이터는 조용히 정체되었으며,
스테이블코인 역시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늙어가고 있다.
어쩌면 문제는
기술도, 제도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기술을 꿈이 아니라 행정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금융 기술이 나올 때마다
기대보다 체념이 먼저 온다.
이번에도 아마
크게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크게 성공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게
우리가 너무 익숙해진
이 나라 금융 혁신의 방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