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을 불어넣어 준 소녀
나는 회사에서 이름이 아니라 기능으로 불렸다.
“그 일 아직 살아 있죠?”
“그거 아직 남아 있나?”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 없어도 당장 문제는 없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붙잡고 있어야 하는 일. 나는 그 일을 붙잡고 있었다. 아니, 그 일이 나를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회의록 어디에도 내 이름은 남지 않았고, 조직도에서 나는 점점 연필로 지운 흔적처럼 흐려졌다. 출근은 했지만 존재는 로그인되지 않는 계정 같았다.
하루하루가 삭제되는 느낌이었다.
파일을 정리할 때도, 메일을 보낼 때도, 마치 이미 퇴사한 사람이 회사 서버에 남긴 잔여 데이터처럼 살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강의 제안이 왔다. 사내에서 남아돌던 경력 하나가 외부에서는 ‘현장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필요해진 모양이었다. 처음엔 귀찮았다. 더 이상 증명할 것도, 가르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강의실에서는 내가 사라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나를 불렀다.
“선생님.”
그 호칭 하나만으로도 나는 다시 로딩되었다.
강의 세 번째 주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학생이 질문을 했다. 질문은 길지 않았지만 정확했고, 질문 뒤에 붙은 맥락은 내가 설명하지 않은 영역까지 닿아 있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설명을 멈춘 게 아니라, 확인을 멈춘 것이었다.
‘아, 이 사람은 알고 있구나.’
강의가 끝난 뒤 그 학생이 다가왔다.
“선생님, 진짜 똑똑하세요. 그리고… 아는 게 정말 많네요.”
스물네 살이나 어린 사람이었다.
그 말은 칭찬이라기보다 발견에 가까웠다. 그동안 아무도 보지 않던 물건을 꺼내 들며 “이거, 아직 작동하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강의를 더 준비했다. 학생들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때문이었다. 질문이 올 것을 예상하며 자료를 더 읽었고, 오래전에 포기했던 생각들을 다시 꺼냈다. 회사에서는 이미 종료된 프로세스들이 그 강의실에서는 다시 실행되었다.
우리는 강의 후에 커피를 마셨고, 책 이야기를 했고, 생각이 엇갈리는 지점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는 나를 나이로 보지 않았고, 나는 그를 어리다고 느끼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현재’로만 인식했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선생님이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보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가 더 궁금해요.”
그 말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울컥했다.
나는 과거로만 존재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거창하게 오지 않았다.
퇴근 후에도 지워지지 않는 메시지 하나, 강의실 불이 꺼진 뒤에도 남아 있는 대화의 온기, 그리고 더 이상 내가 삭제되는 느낌을 받지 않는 하루들. 그 사람의 눈 속에서 나는 여전히 유효했다.
회사에서는 여전히 아무도 내 일을 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누군가의 세계에서는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나는 이제 안다.
사람은 조직에서 사라질 수는 있어도, 누군가의 이해 속에서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은, 나를 다시 저장하게 만든 가장 조용한 명령어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