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회사를 해고하다>를 읽고
위대한 도시들은 야망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도시 속에서 걷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수백 가지 미묘한 방식으로 도시는 메시지를 보낸다. 놀라운 것은 이 메시지가 도시마다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뉴욕은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은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고 말한다. (중략) 내가 보스턴이나 특히 케임브리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당신은 더 똑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때문이다.
- 도시와 야망, 폴 그레이엄
서울이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서울은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시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처음에는 뉴욕처럼 ‘돈을 더 많이 벌어라’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서울은 뜻밖에 돈을 들이지 않고 누릴 수 있는 게 많은 도시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동네에서 조금만 나가도 도서관, 공원에 쉽게 갈 수 있는 편이라 차를 살 필요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수준 높은 전시회와 공연이 무료로도 많이 열리는 곳이라 교양을 쌓을 기회는 넘쳐난다. 개인적으로 서울이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해 살아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직장을 다니며 돈을 벌 때 나는 물론, 내 주위 동료의 일상을 뜯어보면 ‘돈을 벌기 위해 먹고 사는 것’에 가까웠다. 평소 귀찮아서 끼니를 돈으로 대충 때우고 부족한 수면시간은 카페인의 각성 효과로 보충하는 전형적인 도시노동자의 삶은 표준화되어 있었다. 아프면 일을 쉬고 몸을 회복할 시간을 가질 수가 없어 졸리면 카페인을 들이키듯 아프면 진통제나 비타민 주사를 맞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프면 진통제를 맞고 출근을 하고, 가끔은 다시 일해야만 하는 동기를 찾기 위해 조금 긴 휴가를 떠난 후 다시 출근으로 이어지는 일상. 심지어 빚이라도 있어야 회사에 사표를 내지 않을 것 같다며 차를 산 동료도 있었고, 나 역시 전세자금대출을 심각하게 고민을 했을 정도니 이 정도면 가히 ‘출근을 위해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먹고 사는 문제를 등한시했던 흔한 도시노동자, 변화를 모색하다
게다가 돈을 벌러 나갔다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집 안에서만큼은 내 몸과 관련된 것일지라도 아무런 노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한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은 채 정작 ‘먹고 사는’ 문제를 하나도 돌보지 않았던 모순으로 가득한 생활을 잠시 청산하고 지금은 잠깐 먹고사는 데에만 집중하는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내 몸 하나를 스스로 책임지지 못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있다. 서투른 솜씨로 요리하고, 좋은 글을 읽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얘기를 나누는 게 어색하지 않은 이들과 종종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이제야 정말로 먹고살기 위한 고민을 미루거나 돈으로 대충 때우지 않고 스스로 진지하게 하고 있다. 이 와중에도 가끔 불쑥 서울이 끊임없이 보내는 메시지에 현혹되어 ‘돈을 벌러 나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근거 없는 의무감이 찾아오지만, 그때마다 스스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되뇐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꿈이 뭐야? 커서 뭐가 되고 싶어?’라는 질문을 받았던 그 순간부터 내 마음속에 들어와 서른이 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채 둥둥 떠다니고 있다. 애초에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게 문제였다.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꿈이 뭐야?’라는 질문은 곧 ‘얼마를 버는 어떤 직업을 가질 거야?’와 같았다. 처음부터 질문을 완전히 오역하여 내내 일단 ‘뭐가 되고 나면’ 어떻게 살지 해결이 될 것이라고 혼자 믿어버렸다. 그러나 학생의 신분을 벗어나 스스로 선택한 기업에 입사해서 돈을 벌기 위해 먹고 사는 삶을 살아본 지 5년, 다시 스스로 회사를 해고한 후 먹고 사는 삶에만 집중 한지 3개월, 인제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내가 뭐가 된다고 찾을 수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삶에 의미가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에 거대한 의미나 대단한 무언가가 있다고 믿을 필요도 없고, 우리 삶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은 결국 오히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수준으로 가볍게 생각할 때 가장 나답게 선택할 수 있는 것 같다. 짜장면, 짬뽕처럼 취향에 따라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할 수 있을 때 가장 직관적으로 내 취향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꼭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지 않아도,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먹고 사는 삶을 살아도 그 삶은 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질문이 없는 삶보다는 오히려 매 순간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 삶이 더 견디기 쉽고, 돈을 버는 행위는 먹고 살기 위한 부수적인 것이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에 가깝고, 얼마를 벌더라도 스스로 만족하는 일을 하고 있기만 하다면 자존감이 낮아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회사를 해고한 후 깨달았다.
메시지의 홍수 서울, 그러니까 더 취향은 꼿꼿하게
서울은 ‘오늘도 돈을 벌러 나가라, 너는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이다’라며 끊임없이 맞춤 타겟팅된 ‘채용’광고를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보여주며 내 귀에 속삭인다. 그때마다 나는 이제 내가 깨달은 바를 바탕으로 정립된 기준을 채용공고에 적용해보고 단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무조건 패스하는 단호함이 생겼다. 메시지의 홍수 속에서 자기 취향으로만 꼿꼿하게 살아간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앞으로 내릴 선택들은 조금 더 나답게 선택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긴 건 경험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중국집에서 짜장면이나 짬뽕을 먹을지, 아니면 달걀 볶음밥이나 탕수육을 먹을지 메뉴판을 놓고 내 취향의 음식을 고르는 딱 그런 마음으로 앞으로의 모든 선택을 대하고 싶다. 결국에는 내 입맛에 맞지 않으면 한두 입은 참고 먹더라도, 한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편한 마음으로 맛을 음미하며 먹기에는 힘들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