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궁금한 게 있는데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을 읽고

by 황유미

엄마, 나한테 대체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거야?



엄마와 대화할 때 친구나 입사 동기, 지인 등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그 집은 부모님께서 뭐하시는데? 집에 돈이 많나 보네’였다. 그때마다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었다. 일단 나는 친구들의 부모님 직업까지는 궁금하지도 않았거니와 그 집안의 재산 현황은 더더욱 관심사 밖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만국 공통의 고민이고 로또 당첨이 되지 않는 이상 죽기 직전까지 끌어안고 가야 할 문제다. 하지만 어차피 죽기 직전까지 기적 같은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 이상 해결도 안 될 문제인데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너희 집은 어떻게 벌어서 먹고 사는지’만 물어보기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저 나랑 요즘 자주 보는 것, 읽는 것, 자주 하는 생각과 좋아하는 것 등이 비슷하면 쉽게 친해졌고 별로 할 얘기가 없으면 그냥 안 맞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적절히 거리를 뒀다.


때문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준 적이 거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부단히도 엄마는 물어왔다. 엄마가 그런 질문을 하는 데에는 몇 가지 패턴이 있다. 학교에 다닐 때는 국외여행, 어학연수, 유학 등 외국에 간 친구의 얘기를 하면 그런 질문을 했고, 사회인이 된 지금은 개인사업을 하거나 프리랜서로 일하는 등 회사를 그만둔 후 새로운 일을 하는 친구, 그리고 결혼을 한 친구는 전세나 자가로 서울 시내의 아파트에 신혼집을 장만한 친구의 얘기가 나오면 꼭 그런 질문을 한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엄마가 궁금해하는 것들에 제대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아 이제는 거의 물어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듣는다. 그리고 나는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들었음에도 이 질문은 어째서인지 들을 때마다 거북함을 느끼곤 한다.


왜 그렇게도 이 질문이 내 감정을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본다. 약 10년간의 고찰 끝에 나는 이 문장에서 질문을 가장한 무언의 압박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엄마의 질문에는 외국에 가서 공부하는 것, 매월 약속된 월급이 보장되지 않는 직업을 갖는 것,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서울에 집을 사는 것은 ‘우리를 부모로 둔 너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니 일찌감치 마음을 접으렴’이라는 메시지가 깔렸었다. 엄마가 생각하는 엄마 딸의 인생 서사는 아마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의무교육을 착실히 이수한 뒤 모두가 알만한 명문 국내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바로 안정적인 월급이 보장된 정규직으로 회사에 들어가 돈을 착실히 모은 다음, 집 하나 해올 수 있는 남자를 만나 본인이 번 돈으로 결혼하는 것. 엄마는 치밀하게도 딸의 인생 서사에서 넘치거나, 혹은 모자란 선택을 한 친구의 얘기를 딸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을 때마다 혹여나 물이 들까 봐 은밀한 메시지가 깔린 질문을 던져 은연중에 ‘네 주제를 알라’는 수저론을 설파한 것이다. ‘금수저’라는 단어가 유행하기도 훨씬 전인 십수 년 전부터 말이다.



엄마, 내가 대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했던 거야?



자라면서 나는 종종 엄마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의 가치를 다 갖춘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야망을 드러내지는 않으나 조직 내에서 인정을 받아 우수한 성과를 보일 것, 착하지만 손해는 보지 않을 것, 일할 때는 적극적이지만 남성 애인 앞에서는 수동적일 것, 항상 외모를 신경 쓰고 예쁘게 꾸미고 다니지만 사치스럽지 않을 것, 사랑을 나누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으면서도 그 사랑은 미래의 남편감과 우리 가족에게만 집중할 것 등등. 한때는 이러한 문장들이 말이 된다고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일을 하며 야망을 드러내지 않고 설치지도 않으면서 우수한 성과를 인정받는다는 건 구전설화나 신화 속에서나 전해 내려올 법한 이야기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엄마가 그토록 직, 간접적으로 내 앞에 붙기를 바라왔던 형용사들과 내가 내 이름 앞에 붙기를 바라는 형용사 간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추측하건대 엄마는 아마 내 이름 석 자 앞에 이런 형용사가 붙기를 원해 왔을 것이다. 예쁜, 착한, 바른, 참한, 붙임성 있는, 사랑스러운, 우수한,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하지만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군가 나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을 때 나를 가장 기분 좋게 만들었던 수식어들은 다음과 같다. 지적인, 섹시한, 대범한, 몰입하는, 능력 있는, 배려하는, 고요한, 나를 사랑하는. 이러한 수식어나 이와 비슷한 단어들로 내가 묘사될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반면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한 얘기라고 해도 ‘착하다’, ‘예쁘다’, ’붙임성 좋다’ 등 엄마 취향의 형용사들은 그 순간에는 칭찬에 감사할지 몰라도 뒤돌아서자마자 곧 나를 울적하게 만들곤 했다. 마치 내가 보석상의 주인인데 손님이 가장 가치 있는 보석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장식용으로 널어놓은 싸구려 큐빅만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 복잡한 심경을 느꼈기 때문이다.



엄마, 나한테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 하는 거야?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지금 나는 엄마의 간절한 바람을 가뿐히 무시한 채 살고 있다. 갑자기 회사를 때려치우고 글을 쓰겠다고 하는 건 엄마의 시나리오에는 없던 일일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암시해온 엄마의 희망 사항과는 반대로 나는 내 주제를 잘 모르고, 야망이 넘치며, 그걸 억제할 줄도 모르고 억제해야만 하는 이유도 잘 몰라 항상 ‘언젠가 좋은 글로 많은 사람,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감히 해왔다. 그리고 누가 ‘네 글 별로야’라고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나랑 취향이 안 맞았나 봐’라고 생각하고 그냥 다음 글을 쓸 수 있는 뻔뻔스러운 대범함이 있다. 인제야 어느 정도 내 캐릭터를 파악한 엄마는 차마 ‘다시 취직하라’는 재촉은 하지 못하고 있지만, 대신 가끔 연애할 것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종종 ‘글 쓰는 일은 좋은데 돈이 안 돼서 장기적으로 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라는 말을 해왔기 때문인지 엄마는 ‘돈을 버는 남자를 만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나름의 실용적인 계산에 의한 결론을 내린 것 같다. 물론 나는 그냥 살기보다는 최대한 잘 먹고 잘살고 싶으므로 돈이 꼭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연애를 목표로 삼는 건 나로서는 ‘돈이 필요하면 로또를 매주 하나씩 사’ 만큼이나 허황한 소리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퇴직금을 덜 소진하는 현명한 소비습관과 함께 좋은 글을 쓰겠다는 야망, 그리고 내 글을 보여줄 매개체를 부지런히 찾는 노력 정도다. 거기에 추가하자면 매일 아침 머리를 깨울 커피, 글자를 타이핑하는 맥북 하나, 가끔 사 먹는 디저트,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창구 역할을 하는 오랜 친구들, 그리고 글 쓰고 책 만들면서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 그들과의 기분 좋은 느슨한 연대가 있다.


여전히 엄마의 ‘결국 너에게 필요한 건 나중에 몸과 마음을 의탁할 남성 보호자다’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게 분명하고, 또 이러한 가치관의 차이는 설득이 불가할 것이다. 나는 설득 대신 멀고도 가까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잘 먹고 잘사는 모습으로서 엄마의 불안을 경감시키는 전략을 선택했다. 가끔 그럴싸한 요리라도 하는 날이면 일부러 엄마한테 사진을 보낸다. 얼마 전부터 글을 올리기 시작한 브런치의 계정을 공유했다. <피구왕 서영> 2쇄 소식을 알렸다. 약속이 많은척하며 집에는 최대한 띄엄띄엄 내려간다. 가장 중요한 점은 ‘띄엄띄엄’이다. 멀고도 가까운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다 보면 언젠가 엄마도 내 이야기 속으로 초대될 수 있겠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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